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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포기하라고 설득하다

박서진의 명령에 보성시의 교통 도로가 전부 통제되었다. 곧이어 그는 최정수 부부의 뒤를 쫓아 병원 뒤쪽에 있는 듀플렉스 별장 앞에 도착했다. 주옥분은 창백한 안색으로 눈물을 흘리며 최정수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여보, 전에 그 할머니가 옆 별장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어르신의 병을 진료해 주는 의사인 줄 몰랐어요. 당신이 옆집에 사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니까 궁금했을 뿐이에요! 나한테 온 문자를 당신도 봐요. 진짜라니까요.” 주옥분은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받은 문자를 최정수에게 보여줬지만 최정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늦었다. “발버둥 치지 말고 그냥 포기해!” 최정수는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그 다음은 분노했으며 이젠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는 슬픔도 기쁨도 모르는 산송장으로 변해 버린 듯했다. “박서진 씨, 믿어줘요. 박서진 씨는 문자도 봤고 나희정 씨가 보여준 증거도 봤잖아요. 나희정 씨가 닥터 제니는 아니어도 똑같이 훌륭한 의사잖아요. 닥터 제니가 어르신의 치료를 거부했으니까 이참에 나희정 씨에게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주옥분은 뒤돌아 박서진에게 소리쳤지만 박서진의 시선은 닥터 제니가 머무는 옆 별장에 향해 있었다. 이때 이다은이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2층 베란다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옥분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띠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아무 말 없이 별장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다은이 있는 별장에 초인종이 울리더니 인터폰을 통해 박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다은 씨, 저희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죠! 제니 선생님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어요.” 박서진은 간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니 선생님이 저희한테 돌려준 계약금과 위약금은 받지 않을 거예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박서진 씨는 사부님을 의심을 했고 나희정 씨의 말을 믿었어요. 그렇다면 더 이상 저희와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 사부님은 떠났고 이미 취소한 진료를 다시 받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포기하세요!” 이다은은 차갑게 대꾸했다. “저를 만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제니 선생님에게 실례를 범한 건 저희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예요. 제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선생님에게 사과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테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전에 제니 선생님이 제시한 치료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을 끝냈어요.” 이다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박서진은 꼿꼿한 자세로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전에 박서진에게 느껴지던 오만함과 거리감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라지고 태도가 아주 겸손했다. 그러나 닥터 제니가 진료를 취소했다는 것은 더 이상 상의할 여지가 없다는 걸 의미했다. “저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고 죄송하게 생각해요.” 이다은은 몸을 옆으로 비키며 박서진이 별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사부님은 이미 떠났고 저도 연락이 안 돼요.” “이건 뭐예요?” 별장 안으로 들어와 소파로 걸어간 박서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발견했다. 과일 바구니 안에는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카드에는 축복의 말과 함께 수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다은은 앞으로 걸어가 과일 바구니를 한쪽으로 치웠다. “박서진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수지 씨와 아는 사이에요?” 박서진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문득 전에 임수빈에게 수지를 데려오라고 했지만 만나지 못한 이후로 그녀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지는 하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다은과 아는 사이인지 몰랐다. “네.” 박서진이 카드를 본 이상 이다은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다은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수지와 저는 친한 친구예요. 제가 보경시로 온 걸 알고 수지가 특별히 절 만나러 왔고요. 어쩌다 보니 어르신이 여기 입원해 있는 걸 알게 된 수지가 병문안을 가기 위해 과일 바구니를 산 거예요. 근데 급한 연락을 받고 보성시를 떠나야 해서 저한테 대신 병문안을 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요?” 박서진은 수지가 자신이 보낸 문자를 받고 스스로가 환대 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떠난 것이라 여겨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에도 수지는 떠나면서까지 박선재의 호감을 사려 이다은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역시나 박씨 가문에 시집을 오지 못해 안달이 난 허영심 가득한 여자였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단을 수지가 박선재에게 사용하고 있다고 박서진은 생각했다. “왜요? 박서진 씨는 수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요?” 이다은은 박서진의 표정과 말투, 한순간 그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 혐오의 빛을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 수지는 이다은에게 있어 가장 좋은 사람인데 박서진이 무슨 자격으로 수지를 싫어하는 것인지 몰랐다. “그건 아니에요.” 박서진은 허영심이 많고 잔꾀를 부리기 좋아하는 여자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대화 화제를 돌렸다. “부탁드릴게요. 제니 선생님께 말 좀 잘해 주세요.” “죄송한데 그렇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네요.” 이다은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돌아가세요!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고 어르신한테 다른 의사를 찾아주는 편이 좋을 거예요.” “돈은 더 드릴 수 있어요.” “박서진 씨, 믿음이라는 건 한 번 깨진 이상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거예요. 박서진 씨는 사부님를 믿지 않았고 사부님도 더는 박서진 씨를 믿지 않을 거예요. 설령 사부님을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박서진 씨가 또다시 누군가 멋대로 하는 말에 흔들려서 사부님의 신분을 의심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만두고 떠나세요.” 별장을 살펴보던 박서진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죄송해요. 전 꼭 제니 선생님에게 용서를 구할 겁니다.” 이다은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박서진이 별장을 나가기 직전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박서진 씨는 수지와 사이가 좋나요?” 이다은의 질문에 박서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몸을 살짝 돌렸다. “아니요.” 이다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박서진은 멈칫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이다은은 입꼬리를 올렸다.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잠시 침묵하던 박서진은 다시 천천히 대꾸했다. “전에 수지 씨와 만난 적이 없으니 사이가 좋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네.” 이다은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다은 씨, 진심으로 부탁드릴게요. 제니 선생님에게 말 좀 잘해주세요.” “저도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포기하세요!” “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박서진은 별장을 떠났다. 한편 짐 정리를 마치고 별장을 떠나려던 최정수 부부는 박서진이 옆 별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복잡한 얼굴을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 박서진은 최정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다은이 박선재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과일 바구니를 들고 별장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 수지를 대신해서 어르신 병문안을 가려고 하는데 박서진 씨도 같이 갈래요?” 이다은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박서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은은 과일 바구니를 든 채 앞장서서 걸었고 박서진은 뒤따라가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하들이 박서진에게 소식을 보고했는데 그가 명령을 내린 이후 지금까지 그가 말했던 특징을 가진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병원의 출입구도 최정수 부부를 제외하면 드나든 사람이나 차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심지어 최정수의 차량은 경호원이 숨어있는 사람이 없는지 철저히 조사를 하고 나서야 병원 밖으로 보내줬다. 다 큰 성인이 마법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박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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