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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누군가 그녀를 가짜라고 지목하다

이다은은 선물을 사러 갔고 수지는 청주 사립병원에 남아 박선재의 치료에 힘썼다. 당분간 수지는 할머니의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청주 사립병원 뒤쪽에는 듀플렉스 별장이 있는데 수지는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매번 환자 진료를 하러 올 때면 이다은과 함께 이 별장에서 묵었다. 다른 한 채의 별장에는 최정수와 그의 아내 주옥분이 살았다. 주옥분은 전형적인 현모양처로 그녀와 최정수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있다. 두 사람의 아들딸은 어른으로 성장해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부모님에게 효도했다. 그들은 매달 주옥분에게 용돈을 보내주었고 때로는 주옥분과 최정수에게 선물을 사줬으며 정기적으로 집에 돌아와 부모님의 곁을 지켰다. 덕분에 주옥분은 집에서 디저트를 만들고 꽃꽂이를 하는 마음 편한 일상을 보냈다. 주옥분은 옆집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누군가 며칠씩 와서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번 옆집에 오는 사람이 달랐는데 의상하게도 머무는 사람들마다 아무런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공통된 요구사항이 있었다. 주옥분은 옆집 별장에 머무는 손님이 궁금했다. 그러나 매번 그녀가 옆집 손님에게 인사를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최정수는 주옥분에게 옆집 사람을 방해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한편, 별장에 도착한 수지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때 주옥분이 2층 베란다에서 수지에게 말을 걸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주옥분은 눈을 접어 웃으며 수지에게 인사했다. “저는 옆집에 살고 있는 주옥분이에요!” 수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짧게 인사한 수지는 곧이어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옥분은 예의 바르긴 하지만 명백하게 거리를 두는 듯한 수지의 태도에 순간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뭐야!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너무 차갑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린 주옥분은 식사 준비를 위해 뒤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아들딸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라 평소보다 정성 들여 음식을 차려야 했다. 그와 같은 시각, 수지는 3층에 있는 밀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은 뒤 핸드폰을 꺼냈는데 전에 봤던 낯선 번호로부터 또다시 문자가 와 있었다. [충고하는데 할아버지를 핑계로 나와 가까워지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아요. 내가 당신 같은 허영심 많은 여자를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나와 결혼하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마요.] 수지는 어이가 없었다. 전에 이다은에게 돼지 캐릭터를 보내게 하고 상대방이 반격해오는 것을 방어한 뒤로 수지는 이 일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박서진과 박선재의 병에 대해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이런 문자가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이 미친놈이 나한테 들러붙으려는 건가?’ 수지는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싫어했고 특히 이런 미친 사람에게 낭비할 시간은 더욱 없었다. 수지는 상대방을 차단하고 유정숙에서 영상통화를 했다. 곧이어 유정숙이 영상통화를 받았는데 기운이 넘쳐 보였다. “수지야, 서진이 집에서 지내는 건 괜찮아?” 유정숙은 박선재가 병 치료를 위해 보경시로 왔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최근에 지도 교수님과 인턴십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월급을 받게 되면 할머니한테 소금빵을 사드릴게요.” 수지는 다정한 눈빛으로 액정 속의 유정숙을 쳐다보았다. 유정숙은 수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미련을 두는 사람이다. 수지는 유정숙이 오래오래 살기를 원했고 설사 그녀의 정신연령이 6살 아이와 같을지라도 몸만 건강하다면 충분했다. 그러나 유정숙의 건강 상태는 최근 몇 달 동안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사람의 생로병사는 인지상정이지만 수지는 언제나 자신을 아껴주는 유정숙이 자신의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지는 요즘 진귀한 약재를 찾고 있다. 그 약재들은 유정숙의 정신연령을 정상으로 회복시켜주는 것은 물론 그녀의 건강에도 유익해 7,8년을 더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지는 반드시 약재를 찾아 유정숙의 수명을 연장해 주고 싶었다. 자신의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수지에게 유정숙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이다. “수지야, 너무 힘들게 일할 필요 없어. 할머니가 수지한테 준 주식이 있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식 배당금을 받으면서 살면 돼.” 유정숙의 말에 수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유정숙의 정신연령이 6살밖에 되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알았어요. 그렇지만 저도 제 손으로 돈 벌어서 할머니한테 드리고 싶어요! 할머니는 진 간호사님 말 잘 듣고 있어요. 인턴 생활이 끝나면 할머니 보러 갈게요. 요즘 인턴 기간은 3개월이에요!” “그럼 할머니는 3개월 동안 수지를 기다리고 있을게.” “좋아요!” 수지는 유정숙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영상통화를 끊고 아이패드를 꺼내 메일에 쌓인 업무를 처리했다. 업무를 처리하던 중 수지는 이다은이 보낸 메일을 받았다. [사부님, 최 원장의 부인인 주옥분 씨가 갑자기 박서진 씨를 찾아가서 사부님이 닥터 제니를 사칭했다고 말했어요. 게다가 자기는 진짜 닥터 제니를 알고 있다면서 박서진 씨에게 사부님을 믿지 말라고 했어요.] 수지는 손가락으로 액정을 두드리다 답장을 보냈다. [최 원장은 어디 있어?] [최 원장은 방금 전에 전화를 받고 병원을 떠났어요. 그러고 나서 주옥분이 갑자기 자칭 닥터 제니라는 사람을 데리고 병원으로 왔어요.] 수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아까 별장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주옥분은 웃는 얼굴로 수지에게 인사를 했는데 유정숙과 영상통화를 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수지는 이다은에게 다시 물었다. [박서진 씨와 할아버지는 그 말을 믿어?] [사부님이 와서 보면 알 거예요.] [알았어.] 이다은과의 채팅창에서 나온 수지는 재빨리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밀실을 나왔다. 수지가 머무는 별장은 최정수와 주옥분의 별장과 겉모습은 똑같지만 내부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수지의 별장에는 그녀가 직접 설계한 3개의 밀실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방마다 용도가 달랐다. 수지는 매번 별장에 올 때마다 밀실에 들어와 밖에서 하고 다니던 변장을 지우고 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할머니로 위장한 수지는 별장을 나서며 뒤돌아 별장을 바라보았다. 당시 최정수는 뜻을 이루지 못한 중년의 의사였고 수지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최정수는 수지를 아주 존중했으며 자신의 아내와 아들딸에게 옆집 별장의 손님을 존중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오늘, 주옥분은 갑자기 병원으로 달려가 수지가 가짜 닥터 제니라고 지목했다. 전에 없던 뜻밖의 일에 수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이번에 진료를 맡은 환자가 박선재여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지는 박선재가 입원해 있는 VIP 병실에 도착했다. 병실 안에 주옥분은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는데 화려한 외모의 여자는 세련된 오피스룩과 하이힐 차림이었다. 그리고 박서진은 우아한 자태로 무덤덤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으며 박선재는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이다은은 임수빈과 함께 서 있었다. 수지는 여전히 하얀 가운에 마스크와 돋보기안경으로 정체를 꽁꽁 숨겼다. 병실로 들어가 주옥분과 여자를 본 수지는 천천히 걸어가며 일부러 쉰 목소리로 변조했다. “내가 닥터 제니를 사칭했다고 말했다면서요?” “맞아요. 당신은 가짜예요.” 주옥분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분이 바로 진짜 제니 선생님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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