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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성수 박씨 가문의 환자

박서진은 핸드폰을 들고 계속해서 수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지 씨, 이번 일은 사고라고 생각해 넘기겠지만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박서진이 문자를 보내자마자 핸드폰 액정에 스피커를 든 돼지 캐릭터가 나타나더니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미치광이예요. 미치광이, 미치광이, 당신은 미치광이예요. 메롱.”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박서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임 비서, 할아버지 잘 지키고 있어. 할아버지 곁에 경호원을 더 붙여서 수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 박서진은 손가락으로 힘껏 핸드폰 액정을 클릭했지만 돼지 캐릭터는 사라지지 않고 그를 향해 혀를 내밀며 미치광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수빈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한동안 시간을 들였는데도 돼지 캐릭터가 사라지지 않자 박서진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결국에는 돼지 캐릭터가 자동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박서진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어 노트북에 핸드폰을 연결한 후 키보드를 두드렸다. 누군가 자신의 핸드폰에 악성코드를 심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박서진은 상대방에게 반격했다. 한편 이다은은 박서진의 거센 반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점차 수지의 핸드폰 보안이 뚫리기 시작하자 다급히 수지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상대방이 반격을 하고 있어요.” 곁눈질로 핸드폰을 확인한 수지는 핸드폰을 건네받아 빠르게 조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을 다시 이다은에게 던져주었다. “됐어.” “감사합니다, 사부님.” “박씨 가문의 환자를 만나러 가야지!” 방금 전 수지는 최정수와 미리 치료 계획을 정했지만 자세한 것은 환자를 만나 정밀 검사를 진행한 뒤 최종으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환자는 VIP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청주 사립병원 VIP 병실에는 수술실과 요양실이 구비되어 있으며 요양실 외부에는 작은 가정집 스타일로 마련되어 있는데 3개의 침실과 거실, 주방과 식탁, 그리고 샤워실, 화장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 가족이 전부 와서 지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라 수술을 받고 나온 환자는 편안하게 이곳에 입원하여 요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VIP 병실에 입원하는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수지는 환자의 권력이나 재력을 보지 않고 오로지 환자의 질병과 인품만 보고 진료를 맡는다. 만약 환자가 선량한 심정을 가졌는데 중대한 질병에 걸려 치료받을 돈이 없는 상황이라면 수지는 이다은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진료를 맡는다. 그와 반대로 환자가 흉악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수지는 진료를 맡지 않았다. 수지는 의사라면 자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생명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약 한 명의 흉악한 사람을 살려두어 그에게 또다시 다른 사람을 해칠 기회를 준다면 그건 선이 아니라 일종의 악이다. 더군다나 흉악한 사람은 자신의 시한부 인생에 진료까지 거부당한 것을 알게 되면 마음속의 원한과 복수심이 전에 없이 강렬해진다. 이럴 때면 그들은 자신을 치료해 주지 않은 사람을 물귀신처럼 끌고 함께 죽으려 할 것이다. 상대방이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사라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에 수지는 몇 년 동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고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위장했다. 가끔은 나이 든 남자 의사로, 가끔은 할머니처럼 보이는 여의사로, 또 가끔은 젊은 남자 의사나 여의사로 가장했다. 이번에 수지는 겉모습은 늙었지만 아주 정정한 할머니 의사로 위장했다. 수지는 최정수와 함께 사무실에서 나와 VIP 병실로 향했다. VIP 병실에서 박서진은 침대 앞에 앉아 있었고 박선재는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아 욕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VIP 병실로 들어온 수지는 박선재를 보고 멈칫했다가 이내 몸을 돌려 이다은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성수에서 찾아온 환자야?” 이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 사부님.” 이다은은 수지가 위장을 하기 전에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야 했지만 지금은 위장을 한상태이니 거리낌 없이 사부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다은의 말에 수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박선재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박서진일 것이다. 박서진의 실물은 유정숙이 보여준 사진보다 훨씬 잘생겼다.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콧대에 관능적으로 보이는 입술은 보고 있기만 해도 서늘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렀다. 문득 수지는 얼마 전 받았던 낯선 문자를 떠올렸다. ‘설마 박서진이 보낸 문자는 아니겠지?’ 박서진과는 처음 만나는 것이고 이전까지 서로 대화를 해본 적도 없는데 박서진이 혼자 김칫국을 마시며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리는 없다고 수지는 생각했다. 지금은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수지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수지와 최정수, 그리고 이다은이 안으로 들어오자 박서진은 몸을 일으켜 최정수의 앞으로 걸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제니 선생님. 저는 진료를 요청드린 환자 가족입니다.” 박서진의 말에 멍하니 있던 최정수는 급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 “안녕하세요.” “진료받을 환자는 저희 할아버지세요.” 박서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최정수를 훑어봤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닥터 제니가 청주 사립병원의 병원장일 줄은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정수를 쳐다보던 박서진의 시선이 최정수의 뒤쪽에 서 있는 정정해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에게 닿았다. “이분은...” “이분은 제 사부님이세요.” 최정수는 박서진에게 수지를 소개했다. “제 사부님이 바로 제니 선생님이에요.” “실례했습니다.” 최정수의 말에 수지를 대하는 박서진의 태도가 금세 공손하게 변했다. 그에 수지는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박서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박서진에게서는 은은한 나무 향이 났는데 왠지 하씨 가문에 있을 당시 하인이 화장실에 가져다 놓은 방향제 냄새와 비슷하게 느껴져 수지는 이 냄새가 싫었다. “박서진 씨, 향수를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수지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박서진을 피했다. 영문 모를 수지의 말에 박서진은 옷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은은한 나무 향을 제외하면 다른 불쾌한 냄새는 없었다. “전 향수를 뿌리지 않아요. 방금 누굴 데리러 나가면서 묻은 냄새인 것 같은데 지금 가서 옷을 갈아입을게요.” 수지는 박서진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박선재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손 줘보세요.” 수지는 일부러 쉰 목소리로 변조했다. 그녀의 요구에 박선재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우리 서로 연배도 비슷해 보이는데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오빠라고 불러요. 나한테 의동생이 한 명 있는데 나이가 의사 선생과 비슷해요. 아니면 차라리 우리 둘이 의형제를 맺어도 되고.” “할아버지.” 옆에 있던 박서진이 박선재의 말을 제지했다. “이분은 할아버지 진료를 맡아주실 제니 선생님이에요.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의동생을 만드는 걸 좋아하세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박서진의 말에 수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어르신이 참 귀여우시네요.” 수지의 말에 박서진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에게 욕을 퍼부을 때면 늑대가 포효하는 것처럼 사나운 박선재를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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