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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경고

그는 수지에 대한 증오가 이 순간 최대치에 달했다.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어도 마음속으론 이미 그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거나 다름없었다. 허영심 많고 복수에 눈이 먼 이기적인 여자, 재벌가에 시집오려고 갖은 파렴치한 짓을 벌이는 여자였다. “가서 조사해봐. 정말 그 여자가 맞다면 바로 내 앞에 데려와.” 박서진은 음침한 얼굴로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할아버지가 옆에 계시니 수지 이름을 대놓고 부르지도 못했다. “네, 대표님.” 임수빈은 부랴부랴 좀전의 작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창가 옆에 앉아있는 수지가 보였다. 그녀 말고도 또렷한 이목구비에 그윽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혼혈인 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식사하는 중이었다. 임수빈은 진짜 수지란 걸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수지 씨도 참, 대표님을 유혹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와? 진짜 애쓰시네.’ 오성에서 보경시까지 쫓아오는 집착 정도는... 생각만 해도 섬뜩할 따름이었다. 그는 수지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또 뵙네요, 수지 씨.” 고개를 든 수지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안의 음식을 다 삼키고 나서야 천천히 되물었다. “임 비서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 임수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본인이 여기까지 쫓아와 놓고 되레 이런 질문을 하다니... 그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수지 씨, 저희 대표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잠깐만요, 일단 밥부터 먹고요.”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임수빈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식사 마치시는 대로 저와 함께 대표님 뵈러 가시죠.” “네.” 수지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계속 밥을 먹었다. 청주 사립병원에 올 때마다 최 원장은 그녀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드리고 있다. 수지는 딴 건 몰라도 음식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법이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음식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니 어느덧 20분이나 흘러가 버렸다. 옆에서 기다리던 임수빈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냉큼 덩달아 일어났다. “수지 씨, 이쪽입니다.” “수지 씨.” 이때 이다은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불렀다. 수지는 이다은에게 밖에선 사부님이란 호칭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저랑 같이 가요.” “아니야, 괜찮아.” “가요, 임 비서.” 수지가 나름 담담한 어투로 말했지만 이다은은 곧장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 한편 임수빈은 수지를 데리고 다시 원래 오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박서진은 경호원을 시켜 어르신을 원장이 마련한 병실에 보내드리고는 홀로 구석에 서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대표님은 바로 저기 계십니다.” 임수빈이 박서진이 서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수지가 그 방향대로 시선을 옮겼더니 키가 190쯤 돼 보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맞춤 제작한 검은색 정장 차림은 남자의 훤칠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쭉 뻗은 다리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다른 손은 자연스럽게 옆에 내려놓았다. 뒷모습만 봐도 우아하면서도 압도적인 포스가 전해졌다. 수지는 문득 유정숙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쩐지 직접 손주 사윗감을 골라주시더라니, 늘 비주얼을 중히 여기시는 할머니는 이번에도 연예인 뺨치는 수준으로 골라주신 듯싶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왜 이 타이밍에 수지를 보려고 하는 걸까? “수지 씨,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네.” 수지는 임수빈을 따라 박서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십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박서진이 갑자기 병원 대문 입구로 성큼성큼 달려갔다. “?” 임수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표님, 대표님.” “됐어요.” 수지는 비록 박서진의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진 못했지만 여기까지 불러와 놓고 아무런 말도 없이 도망쳐버리는 건 상당히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대표님께서 불편하시다면 다음에 뵙도록 하죠!” 그녀는 곧장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이제 곧 박씨 가문의 환자도 진료해야 하기에 여기서 예의 없는 사람에게 놀아날 시간 따위 없었다. “수지 씨, 수지 씨.” 임수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이를 악물고 방금 박서진이 떠난 방향대로 쫓아갔다. ... 한편 수지가 원장실에 돌아왔을 때 이다은과 최정수는 한창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 문도 굳게 닫고 커튼도 다 친 상태에서 최 원장이 서재 뒤로 걸어가 버튼을 누르자 서재가 천천히 이동하며 열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수지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왔을 때 그녀는 이미 백발에 주름진 노인으로 변해버렸다. 안경을 끼고 나름대로 기운이 넘치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이다은이 의사 가운과 마스크를 그녀에게 건네며 완전 무장을 해드렸다. “사부님, 박씨 가문에서 오신 환자분은 이미 모든 검사를 마쳤습니다. 여기 검사 결과예요.” 원장 최정수가 모든 진단서를 수지에게 건넸다. 그녀는 하나씩 자세히 훑어본 후 대략 짐작이 갔다. “사부님 말씀대로 이 환자분은 심혈관 쪽에 확실히 문제가 있었어요.” 최정수는 당황해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만약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심장 아랫부분의 혈관에 아주 작은 종양이 하나 자라고 있다는 걸 아예 발견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래요.” 수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론 각별히 주의하세요. 성수 박씨 가문에서 이 정도로 애타게 병원을 찾아다니는 건 절대 간단한 케이스가 아니란 걸 말해주죠.” 만약 그 작은 종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수술할 때 각종 돌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다. 환자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만에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 심정지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 사망을 초래하게 된다. 수지가 이왕 이번 건을 받은 이상 절대 제 손에서 환자가 죽게 내버려 둘 리는 없다. 환자가 저승길에 오른다고 해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이승으로 다시 끌어올 것이다. “사부님,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어요.” 수지는 일할 때 휴대폰을 이다은에게 맡겨둔다. 만약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이면 이다은은 그녀에게 메시지나 전화를 제때 보고해드린다. 그도 그럴 것이 사부님은 부캐가 워낙 많아 또 다른 분야에도 담당하는 직원들이 있기에 전화나 메시지는 바로 보고해드려야 한다. 이다은은 단지 닥터 제니 부분만 담당하고 있으니까. 휴대폰을 건네받은 수지는 메시지를 열어보았는데 낯선 번호로 온 문자였다. [수지 씨, 경고하는데 우리 할아버지한테 내 일정 작작 물어요. 여자가 자중 좀 합시다.] 순간 그녀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친 거 아니야?’ 수지는 구시렁거리면서 단호하게 이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앞으로 이런 병X 같은 문자는 일절 차단해. 그리고 상대방 휴대폰에 바이러스 심어놔서 보내는 메시지마다 짱구 이모티콘으로 만들어버려!” 수지는 이다은에게 휴대폰을 내던지고 계속 최정수와 함께 박씨 가문 환자분의 심장 상황을 연구했다. “네, 사부님.” 이다은은 휴대폰을 건네받고 옆으로 가서 노트북을 연 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시각 박서진은 수지의 답장이 없자 도통 마음이 안 내켰다. 아까는 돌발상황 때문에 경황이 없어 수지를 못 만났다. 지금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니 이 여자가 또 갖은 수단으로 그의 일정을 캐묻고 취미까지 알아내며 가까이 들이댈까 봐 미리 메시지를 보내서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다만 허영심 많고 복수에 눈이 먼 이 여자가, 전 약혼자에게 복수할 마음뿐인 이 여자가 메시지를 통째로 씹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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