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하여 배민훈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갖고 창가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한편 무시당한 이시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전화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알겠습니다. 그때 갈게요."
짧게 몇 마디 나누고 곧바로 끊었다.
이시아가 물었다. "학교에서 온 전화야? 민지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배민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두운 얼굴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 시험에서 민지가 꼴등을 했대. 20일 뒤에 모의고사가 있는데 성적이 나온 뒤에 학부모회가 있대."
배민훈은 송민지의 유일안 보호자이다.
"꼴등? 내 기억에 민지의 성적이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야?" 이시아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이렇게 해. 내가 널 대신해 학부모회에 참석할게. 넌 2주 뒤에 H시로 출장가야 하잖아. 일에 영향주면 안 되지. 아무튼 나도 민지의 언니잖아."
배민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 오늘 가족 연회가 있는데 안 가?"
배민훈이 덤덤하게 말했다. "바빠."
...
한편 송민지는 밥을 먹고 숙제를 끝내니 이미 8시 반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녀는 대학 상가를 나오던 그때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그 모습에 주익현은 그녀와 함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머리를 숙인 채 바라보았다. "감기 걸린 거야?"
송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상가에서 나온 뒤에 계속 눈꺼풀이 뛰는 거 같아."
"그냥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거야. 괜한 걱정하지 마. 과제를 마친 뒤에는 제대로 복습해야 해. 오늘 내가 말했던 걸 꼭 외워. 내일 내가 확인할 거야." 그때 17번 버스가 도착하자 주익현이 가방을 그녀에게 건넸다.
차에 올라가던 중에 송민지가 고개를 돌렸다. "넌? 나랑 같이 안 가는 거야?"
주익현이 대답했다. "난 아르바이트가 남았어. 좀 늦게 들어갈 거야. 너 먼저 돌아가."
"그래. 도착하면 문자할게."
주익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송민지는 동전을 넣고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30분 정도 지나자 송민지는 너무 피곤해 눈을 감고 조금 쉬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집 문을 열던 그때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익숙한 디저트 박스를 발견했다.
송민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누가 보낸 걸까?'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이시아가 오빠에게 사준 간식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녀가 이곳에 살고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오빠, 그리고 고서원 밖에 없다. '설마 오빠일까?'
박스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밤빵이었다. 밤빵이 너무 달아 그녀의 입맛에 안 맞아 그녀는 곧바로 냉장고에 넣었다.
'내일 주익현에게 줘야지.'
그때 송민지가 주익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난 도착했어. 넌 어디야? 얼마나 더 걸려?]
주익현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책보고 있어. 모르는 곳이 있으면 내가 내일 가르쳐 줄게.]
송민지가 대답했다. [그래.]
한편 한 바베큐 가게에서 주익현은 요리사 유니폼을 입은 채 쓰레기를 버리고 있었다.
답장을 한 뒤, 주익현은 고용주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물었다. "우리 아내한테 들었는데 사직했다면서? 가정교사로 계속 일할 생각은 없는 거야? 급여 문제면 다시 협상해도 돼. 우리 아영이가 널 아주 칭찬하던데... 네 강의를 들은 뒤부터 성적이 아주 좋아졌어."
주익현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붙을 수 있을 거예요. 더 이상 제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의 거절에 상대는 강요할 수 없었다. "그래. 다시 돌아오고 싶으면 이전보다 3배 높은 급여를 줄게. 그리고 조금 뒤에 그동안 했던 수강료를 이체할게."
"네."
전화를 끊자마자 주익현은 십만원의 수강료를 받았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시각, 송민지는 수학 공식을 외운 뒤 영어 단어를 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책상 위에 기대어 잠들어버렸고 바람 소리에 깨어나보니 이미 12시였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주익현: [자는 거야?]
송민지가 눈을 비비며 재빨리 답장했다. [아니, 넌 퇴근했어?]
주익현 : [그럼 내려와. 야식 가져왔어.]
그가 온 것일까?
송민지는 순식간에 졸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빠르게 핸드폰을 집어들고 얇은 외투를 입고 급히 나갔다. 그리고 내려가는 도중에 갑자기 생각이 나 주방에 들어간 뒤 냉장고에서 밤빵을 꺼냈다. [금방 내려갈게.]
송민지는 복도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갈 때, 얇은 셔츠를 입은 주익현이 가로등 아래에서 꼬치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주익현은 그녀가 방금 씻은 걸 알아차린 것인지 자신의 셔츠를 벤치에 깔고 그녀에게 앉으라고 했다. 송민지는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고 그는 허리를 곧게 편 채 앉아있었다. 그의 옷에는 바비큐 냄새가 가득했지만 송민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듯 입가에 양념이 묻은 채로 야무지게 먹었다 "주익현, 이 시간에 문자했다가 내가 혹시 자면 어쩌려고?"
"못 잘 거야. 네 속도로 내가 너한테 준 숙제를 완성하려면 12시가 될 거야."
송민지는 흠칫 놀라 손에 든 꼬치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손에 묻은 기름을 신경 쓰지 않고 주익현의 얼굴을 만지면서 활짝 웃었다. "와, 주익현! 너 정말 대단한데. 그런 걸 계산하다니."
비록 주익현은 덤덤한 척 했지만 바지를 꽉 잡고 있던 그의 손 때문에 감정을 들키고 말았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던 그때 송민지는 숨을 죽였다. 이 동작은 전생에서 그녀가 그에게 자주 한 행동이지만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단지 일반 친구사이라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
"너 손에 기름이 묻었어."
송민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해. 좀 닦을게."
그때 주익현이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옷에 닦지 마. 잘 씻기지 않아."
그를 보고 있자 송민지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만약 그녀가 전생에 주익현에게 시집갔다면 그럼... 그렇게 고문 당하고 산 채로 매장 당하는 처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송민지는 마치 그의 모습 하나하나를 기억하려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감옥에 있던 주익현이 자신이 죽은 소식을 알게 되면 어떨까? 감히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주익현은 어떻게 변할까.
달이 떠다니는 구름에 가려졌고
밤하늘은 아주 어두웠다.
송민지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주익현, 도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