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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아파트 문 앞에 도착한 후 잠금장치를 보던 성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내가 할게.” 온유나가 숙련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에 들어가서 깨끗한 타올을 그에게 건넸다. “새거야. 아줌마더러 매주 한 번씩 청소하라고 부탁했거든.” 오늘의 그녀는 그저 옆에 서서 수건을 건넬 뿐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얼른 앞으로 다가가 직접 성우진을 닦아주었을 텐데 말이다. 온유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 본인도 눈에 푹 젖었으면서 먼저 그에게 수건을 건넸으니. “먼저 가서 씻어. 내가 옷 갈아입고 식자재 주문해서 밥해줄게.” 말을 마친 온유나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성우진과 또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성우진은 또다시 머리가 아프고 봉인된 무언가가 뚫고 나올 것 같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성우진이 출근하기 편하라고 산 집이다. 그때 온유나는 아직 아빠의 힘을 빌려 그를 도와줄 때가 아니었고 모든 걸 성우진 스스로 감당했어야 했다. 성씨 저택은 회사와 너무 멀고 그 당시 회사는 겉보기엔 강해도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바람이 휙 불면 큰 문제를 일으키기에 십상이었다. 결국 성우진은 거의 회사에서 지내다시피 살아왔다. 정 힘들다 싶으면 이 아파트에 와서 하룻밤 눈 붙일 정도였다. 나중에 온유나와 결혼한 후 그녀가 이곳에서 몇 개월 동안 함께해줬다. 옷을 다 갈아입은 온유나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 식자재를 주문했다. 그녀는 이 집안 곳곳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잔잔한 미련이 남았다. 이 집은 구석구석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너무 아쉽지만 인제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 ... 성우진이 나왔을 때 온유나가 주문한 식자재도 어느덧 도착했고 그녀는 한창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따사로운 주방 조명이 그녀 몸에 드리워지자 유난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성우진은 문밖에 서서 그녀가 깔끔하고 신속하게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더니 머리가 또다시 아파졌다. 그녀는 참 괜찮은 아내이지만 단지 그와 어울리지 않을 뿐이다. 성우진이 소리 없이 주방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는 분주히 돌아치는 온유나를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온유나가 음식을 다 만들고 돌아서서 그를 부르려던 찰나, 눈앞에 떡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언제 나왔어?” 그녀가 음식을 식탁으로 옮기며 물었다. “밥 먹으라고 부르려던 참인데.” “한 10분쯤 됐나.” 성우진이 대답했다. “얼른 밥 먹자.” 온유나가 음식을 다 세팅한 후 잡곡밥 두 그릇까지 예쁘게 담아왔다. 그녀는 성우진의 맞은편에 앉아서 살짝 속수무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대충했어. 너무 기대하진 말고.” 말하고 나니 참 웃긴 상황이었다. 둘은 결혼 4년 차인데 그녀는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정성껏 도시락을 만들어줘도 그의 사무실 책상에 놓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만 알고 있다. 휴지통에 버려지거나 경호원들 뱃속으로 들어가기가 일쑤였다. 성우진은 여태껏 그녀가 해준 밥을 안 먹었다. 그러던 오늘 한 상 차려진 요리를 보니 손이 살짝 떨렸다. 전에는 도시락을 싸서 회사까지 보내왔지만 그때도 성우진은 그 도시락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맛있네.” 그가 고기 한 점을 집었다. “그럼 다행이고.” 온유나가 웃으며 고개 숙여 음식을 먹었다.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그녀였다. “우진아, 나 솔직히 너랑 마주 앉아서 저녁 먹을 날이 올 줄은 감히 상상도 못 했어.” “고마워. 역겨움도 무릅쓰고 내 소원 이뤄줘서.” 온유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지만 듣고 있는 성우진에겐 가시 돋친 말로 변해버렸다. 저 자신을 비웃는 듯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성우진도 마음이 괴로웠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물건이 자꾸 심장을 조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유나는 웃으며 음식을 먹었는데 무슨 맛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성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침묵한 분위기는 식사 타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알고 있다. 이건 성우진과 함께한 인생 중에 가장 부부다운 모습이란 것을, 아내로서 남편을 섬기는 애틋한 장면이란 것을 말이다. 식사를 마친 후 온유나가 수저를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오니 성우진이 여전히 거실에 앉아있었다. 거실 등을 켜지 않고 현관 쪽의 작은 등만 어렴풋이 빛을 밝혔다. “아직 안 갔어?” 온유나는 묻는 즉시 얼마나 당돌한 질문인지 알아챘다. 여긴 성우진의 집이라 떠나야 할 사람은 그녀였다. “미안, 여기 있는 내 물건들 챙겨서 금방 갈게.” 그녀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 가거든 집안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네 스타일대로 리모델링하거나 알아서 해.” 그녀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서 옷을 다 챙긴 후 남은 반쪽 옷장을 열었는데 다치지도 않은 정장과 셔츠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성우진은 그녀가 사준 옷마저 입길 꺼렸다... 사실 이 안의 대부분 셔츠는 그녀가 손수 만든 작품인데 성우진이 싫증 낼까 봐 딱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정도로 싫어할 줄이야. 그녀가 사준 옷마저 건드리지 않는다니... 4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그녀는 정말 가엽고도 우스운 꼴로 몰락했다. 온유나가 드레스룸을 텅 비우고 나오자 마침 캐리어 하나가 꽉 채워졌다. 그녀가 나왔을 때 성우진은 계속 집 안에 있었다. 온유나가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성우진이 질문을 건넸다. “수년간 날 좋아해 온 결과가 고작 이런 거네. 넌 만족해? 유나야?” 그도 자신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한 건지 모른다. 문득 뇌리를 스친 질문이라 그대로 입밖에 내뱉었을 뿐이다. 온유나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널 좋아한 건 오롯이 내가 원해서 한 일이야. 만족하고 말 것도 없어.” “우리 사이는 내가 원해서 얻은 거고 내 멋대로 나와서 초래한 결과였지. 나도 다 알아.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어. 미안하게 생각해. 특히 너한테 가장 미안해.” “오늘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앞으로 꼭 잘 살길 바라.” 온유나가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난 후회하진 않아.” 그녀는 성우진의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너뜨릴 사람도 아니다. 제일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몇 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성우진이 내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온유나도 여태껏 오리무중이다. 그해 성우진을 언덕으로 끌어올린 후 돌아가는 길에서 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길래 그녀를 이토록 말끔하게 잊은 건지 말이다. 그에게 감히 물을 수도 없었다. 물어볼 때마다 성우진은 그녀가 자신의 사생활을 염탐한다고 몰아붙이니까. 이런 죄명을 뒤집어쓸 그녀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더 묻는 일도 없었다. 이젠 그가 기억해내든 말든 아무 의미가 없다. 둘 사이의 그 과거는 온유나가 이 집을 떠나면서부터 영원히 사라질 테니까. 먼 훗날 그가 기억해낸다고 하더라도 더는 온유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신분을 사칭한 여자로 그의 인생에 개입했다가 또 결국 그 신분 그대로 퇴장했다. 이 또한 원만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실내조명이 어두컴컴하고 두꺼운 통유리창 밖으로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한순간 분위기가 이상하리만큼 애틋해졌다. 온유나가 시선을 올리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한편 성우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가 원래 이렇게 아무 표정도 없는 남자란 걸 온유나는 너무 잘 안다. 이때 성우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앞으론 나 같은 사람 만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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