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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성우진은 딱 한순간만큼은 마음이 설렜지만 곧장 그녀의 만행을 떠올렸다. 그는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유나야, 이렇게 된 마당에 또 무슨 수작인 건데?” 그의 질문은 또다시 온유나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이제 더는 그에게 애원할 수가 없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인 만큼 사랑을 위해서 또다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온유나는 시선을 올리고 꽁꽁 얼어서 빨갛게 된 손으로 다시 그를 붙잡았다. “수작 아니야. 그럴 기력도 없어 이젠. 단지 우리 결혼 생활에 해피엔딩을 만들어주고 싶을 뿐이야. 나 내일이면 경운시 떠나. 더는 여기 올 일 없을 거야. 앞으로 두 번 다시 네 눈앞에 띄는 일 없을 거라고.” 성우진은 그녀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하더니 관자놀이가 조여왔다. 문득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또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손을 꽉 잡으며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성우진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머리가 아프고 마치 봉인된 힘이 칸막이를 뚫고 그의 기억 속으로 밀려들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오직 본인만의 기억이라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대체 언제 그 기억을 잃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꿈에서 늘 순수하고 예쁜 여자아이가 나타났는데 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꿈속의 그 얼굴이 놀랍게도 온유나와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성우진은 문득 황당하기 그지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유나가 날 속인 게 아니었어. 그해 날 구해준 여자애가 바로 유나였다고!’ 다만 그는 재빨리 이 생각을 지웠다. 온유나가 어떻게 그 여자아이일 수 있을까?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가족을 앞장세우며 성우진을 몰아세우는 여자일 뿐인데. 온유나는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자연스럽게 물었다. “어디 불편해?” 그녀는 성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하게 살펴서 자칫 변화가 있어도 바로 알아챈다. 성우진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입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녀의 제안을 왠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성우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한 말 지켜야 해.” 온유나의 마음이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 짜릿한 바닷물에 잠겨버렸다. 그녀는 저도 몰래 눈시울이 빨개졌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못 믿는 성우진 때문인지 아니면 밤바람이 세게 휘몰아쳐서 그런 건지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몇 초 후 그녀는 잘생긴 성우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걱정 마. 널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 “타.” 성우진이 차 문을 열고 그녀에게 말했다. “뒤에 있는 아파트로 가면 안 될까?” 온유나의 눈동자에 잔잔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 아파트 높이가 적당해서 겨울에 눈 감상하기 좋은 명당이잖아.” 겨울은 늘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성진 그룹 주변의 가로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흰 눈에 반사되어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성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딱히 거절하지도 않았다. 손잡이에 올렸던 손을 내려놓은 후 아파트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였다. 온유나가 뒤따라오며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봤다. 순간 그녀의 마음이 더 씁쓸해졌다.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건 영원히 가질 수가 없다. 인제 그만 깨어날 때가 되었다. 십여 년간의 짝사랑은 결국 아무런 수확도 없는데 계속 이어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눈밭에는 타박타박 지나간 두 사람의 발자국만 남기게 되었다. 그 누가 봐도 애틋한 커플 발자국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이혼한 부부, 앞으로 더는 볼 일 없는 남남이었다. 눈보라가 더 세게 휘몰아쳤다. 이때 온유나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빨개진 손을 내밀자 눈꽃 송이가 고스란히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성우진은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니 그녀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줄 알고 고개를 돌렸는데 온유나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뭐해?” 온유나는 정신을 다잡고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에 읽은 좋은 문구가 생각나서. 함께 머리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일 때까지 걸으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할 거라고 했거든. 넌 들어봤어?”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인데 늘 그녀에게 낭만적인 인상을 남겨주고 있었다. “몰라. 그런 거.” 성우진이 피식 웃었다. “별 걸 다 믿네.” 온유나도 저 자신이 우스웠다. “그러게 말이야.” “오로라에 소원 빌면 이뤄진다는 말도 들었어. 그래서 신혼여행 때 홀로 핀란드까지 가서 오로라를 기다렸는데 결국 소원은 안 이뤄졌네.”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도 분명 가짜일 거야. 어떻게 함께 눈을 맞았다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겠어? 우린 이미 이혼했고 내일이면 남남이 될 거잖아. 우린 각자 인생의 반쪽이 있을 테지만 그게 우리 서로는 아니네?” 온유나는 이젠 정말 다 내려놓은 듯 소탈하게 이런 말들을 내뱉었다. 성우진을 자극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롯이 본인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밤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매서울 따름이었다. 그녀가 옷을 적게 입은 건 아니지만 혹한의 추위를 감당할 만한 옷은 아니었다. 바람이 불자 그녀가 몸서리치며 두 손 모아 입김을 불었다. “그렇게 추워?” 온유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전 같으면 분명 안 춥다고 말했을 그녀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많이 춥네.” 성우진이 코트를 벗어서 그녀에게 건네주려 했지만 온유나가 얼른 말렸다. “괜찮아. 거의 다 왔어. 너 감기 걸리면 나만 삿대질 당하고 욕먹을 거 아니야. 제발 벗지 마.” 다만 성우진은 끝내 코트를 벗어 그녀 몸에 걸쳐주었다. “입만 벌리면 헛소리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성진 그룹에서 아파트까지 그리 멀진 않지만 한동안 걸어가야 했다. 두 사람이 빨리 걷지 않으면 절대 금방 도착할 수가 없었다. 온유나는 그의 코트를 걸치고 피식 웃었다. 사실 그녀는 여전히 성우진을 많이 사랑하고 그가 아프길 원치 않는다. 오늘의 만찬도 그녀가 먼저 제안했듯이... 하지만 감히 더 많은 걸 바랄 수도 없고 또 더 미련을 남기고 싶지도 않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동생 온유희가 전화 온 적이 있는데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언니, 이왕 결정했으면 자꾸 번복하지 마. 언니는 이미 그 사람한테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 인제 그만 미련 버리라고.” 그랬다. 인제 그만 미련을 내려놓아야 한다.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녀는 성우진을 사랑한 십여 년 간의 모든 일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동안 성우진은 확실히 그녀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고 그녀에게 감동을 받은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뭐 물론 그녀가 집안의 권세를 믿고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굴어서 원하는 건 뭐든 다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은 상상 속의 세상처럼 모든 걸 다 이룰 순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 꼴이 나고 말았겠지. 두 사람은 어느덧 나란히 어깨를 견주며 걸어갔다. 온유나가 코를 훌쩍거렸다. “우리가 이토록 차분하게 거리를 거닐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를 만날 때마다 싸늘한 눈빛을 마주해야 했으니까. 온유나는 진작 적응했기에 오히려 오늘이 부자연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추억이었다. ‘오늘 여길 오길 잘했네.’ 온유나가 몰래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만날 일이 있더라도, 혹은 평생 안 볼지라도 이렇게 나란히 걸으니 죽을 때까지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한편 성우진은 침묵했다. 이에 그녀가 또다시 말을 꺼냈다. “나 진짜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니야.”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알아.” 어느 물음에 대한 답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온유나는 그저 웃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성우진은 끝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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