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온세라는 최서진의 품에 안겨 차에 탔다. 무릎 통증도 꿈처럼 더는 느껴지지 않았고, 처음으로 이 남자가 겉으로 보기처럼 냉혹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안에 앉아서 온세라는 그를 보면서 손짓했다.
[당신은 왜 나를 도우려고 하는 거예요?]
방금 교장실에서 그녀가 물어본 질문에 최서진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이 판을 꾸미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을 텐데 이것은 최서진이 해낼 수 있는 일 같지 않았다.
최서진은 그녀의 손짓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수화는 읽어낼 수 없었지만 온세라의 감격에 찬 눈빛에서 그녀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널 위한 게 아니야.”
최서진의 말투는 그의 얼굴만큼이나 차가웠다,
“내가 이 일을 밝혀낸 것은 단지 최씨가문의 체면을 위해서일 뿐이야. 네가 최씨 가문에에 시집왔으니 이젠 최씨 가문의 사람이야. 네가 본분을 잘 지켜야 우리 모두 무사해. 또 이런 문제를 일으키면 내가 무례하다고 탓하지 마.”
차가운 목소리가 차 안에서 울려 퍼지며 온세라의 마음 한구석의 따뜻함을 순식간에 식혔다.
‘하긴, 최서진이 어떻게 나를 신경 쓰겠어?’
온세라는 어젯밤 자신을 대하던 그의 태도를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최서진은 그녀를 반드시 쫓아낼 것이다.
가는 내내 더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온세라를 최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려보낸 뒤 최서진은 머물지 않고 운전 기사에게 회사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차가 도시의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대표님, 학교 쪽은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앞으로 그 일에 대한 소문은 일절 나오지 않을 것이고, 언론 쪽에서도 기사를 철회하고 사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최서진은 뒷좌석에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는데, 우람한 이목구비가 차창유리에 비쳐 더욱 차갑고 엄해 보였다.
“몇 년 만에 일이 다시 들통났으니 체육 선생님이 이렇게 큰 재주는 없을 것 같아.”
“배후에 누군가 부추겼다는 말씀이세요?”
“경찰에 인계되기 전에 잘 살펴봐.”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고등학교 체육 교사가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뉴스가 실검에 올랐다. 피해자들이 연합하여 성토했고, 실검에 올랐던 ‘최씨 가문 작은 사모님’에 관한 뉴스가 순식간에 뒤덮여 인터넷 여론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체육 교사 이모 씨는 이미 경찰에 넘겨져 다년간 누차 범행을 저지른 것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에 관해 계속 후속 보도를 할 것입니다...”
TV의 대형 스크린에서 기자가 그날의 법제 뉴스를 또박또박 방송하고 있었다.
“요즘 뉴스는 정말 믿을 수 없어. 매일 다른 말을 해.”
소시연은 퉁명스럽게 TV를 끄고, 팔짱을 낀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울분을 토했다.
이 뉴스로 미운털이 박힌 벙어리를 쫓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줄은 몰랐다. 더욱 뜻밖인 것은 최서진이 사람을 데리고 직접 이 일을 조사해서 밝혀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최서진을 직접 키운 그녀는 그가 어떻게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자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최서진이 온세라를 계속 최씨 가문에 남겨두는 것에 대해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모님, 미스 온 오셨습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소시연을 생각에서 끌어당겼다.
“미라 왔어?”
소시연은 일어나서 온미라를 맞이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너... 뉴스 봤어?”
“뉴스? 무슨 뉴스요?”
온미라는 소파에 앉아 의문스러운 듯 소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벙어리 말이야. 네 언니의 이전 사건이 누명을 쓴 것으로 밝혀졌고, 너희 학교 체육 선생님이 고발당해서 지금 경찰에 잡혔어.”
“네? 그럴 리가요?”
“그러게 말이야. 너 전에 언니가 그 체육 선생님과 사귀었다고 단호하게 말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반전되었지? 이제 됐어, 서진이는 또 내가 근거 없이 사람을 잡았다고 할 거야!”
소시연의 말은, 분명히 온미라를 탓하고 있었다.
온미라는 살짝 놀라며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시연 이모, 그 당시 이 일은 학교에서 소란스러웠고, 전교생이 다 알고 있었는데, 어찌 서진 오빠가 학교에 갔다 왔다고 일이 다 가라앉을 수 있겠어요?”
이 말을 들은 소시연의 기색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기사를 쓰는 사람은 정말 대담해요. 우리 언니가 지금 최씨 가문 작은 사모님인 걸 알면서도 감히 이런 원고를 내다니. 정말 최씨 가문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렵지도 않나 봐요.”
온미라의 말이 소시연을 일깨워줬다. 그녀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네 말은, 이 일이 최씨 가문을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 거야...”
온미라는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시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채 책임을 자기한테서 깨끗이 털어냈다.
“시연 이모,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해요. 우리 언니는 이제 최씨 가문 작은 사모님이에요. 그러니 당연히 다 언니 편이죠.”
다 언니 편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했다.
소시연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온세라는 온미라를 속여 최씨 가문에 시집온 ‘전과’가 있는 것을 바탕으로, 그녀는 온미라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물며 최서진의 태도가 확실히 이상했다. 그가 어떻게 한 여자의 결백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틀림없이 최씨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일 거로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벙어리년!’
여기까지 생각한 소시연은 찻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줌마, 그 벙어리는? 어디로 도망갔어? 집에 손님이 왔는데 모르고 인사하러 나오는 것도 모른대? 교양이 하나도 없어!”
“지금 부르겠습니다.”
그 시간, 온세라는 방에서 쉬고 있었다.
어제 찬물에 그토록 흠뻑 젖었고, 최서진이 사람을 시켜 준비한 생강 탕도 감히 못 마셨다. 그래서 아침에 돌아오자마자 온몸에 오한이 나더니 지금은 이불 속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거친 문 여는 소리에 온세라는 악몽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오미숙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오미숙이 놀란 듯 말했다.
“사모님, 왜 아직도 주무세요?”
온세라는 이불에서 손을 내밀어 힘없는 손짓을 했다.
[무슨 일 있어요?]
“손짓하지 마세요. 이해가 안 돼요.”
오미숙의 말투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사모님께서 내려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온미라 씨 오셨거든요.”
‘온미라가 왔다고?’
온세라는 마음이 무거웠지만 안간힘을 써 겨우 일어났다.
고등학교의 일이 갑자기 들통났는데, 이 일은 아마 온미라의 공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지금 자신을 최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사람은 그녀일 것이니 말이다.
협박이 실패했으니 십중팔구는 그녀의 보복일 것이다.
온미라와 엮이는 것은 싫었지만 최서진은 지금 자신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하니 조심스럽게 대처하며 온미라와 더는 얼굴을 붉힐 수도 없었다.
온세라는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내려왔는데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고 내려갈 때도 발걸음이 무기력해서 계단 손잡이를 짚지 않았더라면 자칫 굴러떨어질 뻔했다.
“언니, 왜 안색이 안 좋아?”
온미라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가식적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시연은 조금 퉁명스럽게 온세라를 흘겨보았다.
“다 죽어가는 척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거야? 친정 식구들에게 네가 우리 최씨 가문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고 알리고 나가서 우리 최씨 가문의 체면을 구기려는 것이 목적이야? 이렇게 된 것도 네가 자초한 것이 아니야?”
온세라는 계단 입구에 서서 반박할 힘도 없다.
“뭘 꾸물거려? 가서 간식 좀 가져와, 역시 사생녀는 사생녀야. 손님 맞이할 줄도 모른다니깐. 엄마가 낳기만 하고 제대로 키운 게 하나도 없어.”
삿대질하며 하는 소시연의 말을 들으면서 온세라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갔다.
온미라는 눈빛을 돌리며 말했다.
“시연 이모, 언니가 아픈 것 같은데 제가 가서 좀 도와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