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대화의 편의를 위해 사무실에는 최서진이 데리고 온 수화 선생님이 온세라의 통역을 도와주었다.
온세라는 이를 악물고 체육 선생님의 눈을 노려보았다.
[영상 속의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설명해 주세요.]
“왜 네가 아니지? 그땐 네가 나를 먼저 유혹했잖아.”
체육 선생님이 말했다.
[헛소리.]
온세라는 빠르게 손짓했다.
[내가 왜 당신을 유혹했어요?】
최서진은 수화 통역사의 말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온세라는 벙어리이지만 그래도 온씨 가문의 아가씨였다. 못생긴 체육 선생님을 유혹했다니 불가사의했다.
체육 선생님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체육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였어. 당시 각 과목의 성적이 우수해야 해외 유학을 신청할 수 있는데 넌 체육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나를 꼬셨고 또 동영상으로 협박을 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성적을 수정해 주었지.”
온세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급하게 손짓하며 변명했다.
‘어떻게 성적을 고치기 위해 선생님을 유혹할 수 있겠어?’
그녀를 바라보는 최서진의 시선도 변했다.
상황이 난감해지자 최서진은 차갑게 말했다.
“서류를 가져와.”
학교의 서류에는 각 과목의 성적이 기록돼 있어 서류만 보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질 수 있었다.
서류를 가져왔다. 온세라는 벙어리지만 각 과목 성적이 월등히 뛰어났는데 유독 고등학교 2학년 학기 말 체육 성적만 빨간 줄이 그어진 불합격이었다.
불합격에서 합격으로 변하게 되면 누구나 문제를 보아낼 수 있었다.
최서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쌀쌀하게 온세라에게 물었다.
“더 할 말이 있어?”
온세라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봉투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오늘부터 넌 최씨 가문의 며느리가 아니야!”
말 한마디에 사무실 전체가 입을 다물고는 조용해졌다.
온세라는 당황해졌다. 최서진이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최씨 가문을 떠날 수 없었고 떠나면 안 되었다. 외할머니의 목숨이 온재혁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온세라는 최서진의 길을 막고 다급하게 손짓했다.
[친구들이 증언할 수 있어요.]
“그럴 필요 없어. 최씨 가문에 먹칠하지 마.”
최서진의 말투는 매우 차가웠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온세라를 힐끗 쳐다보더니 조금도 주저 없이 성큼성큼 떠났다.
“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급히 뒤를 따라갔고 나머지 선생님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최서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온세라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누가 무심결에 그녀와 부딪쳤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휘청거리며 무릎이 탁자에 부딪혀 고통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온세라 씨?”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든 온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제대로 서기도 전에 뒷걸음질 치며 겁에 질린 듯 대머리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온세라와 체육 선생님만 남았다.
[오지 마.]
“최서진 대표가 찾아오니 큰 재난이 닥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어. 온세라, 최씨 가문에서 지내기 힘들구나.”
온세라는 순식간에 손발이 차가워졌고 도망가려고 문 밖의 상황을 살폈다.
체육 선생님은 잽싸게 그녀의 팔을 덥석 잡더니 거칠게 잡아당겨 소파에 내동댕이치며 험악하게 말했다.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도망가?”
온세라는 넘어지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대지 마! 누가 나 좀 살려줘요!’
그녀는 열심히 입을 벌려 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목에서는 겨우 ‘흑흑’ 소리만 날 뿐이었다.
“겁먹지 마.”
체육 선생님은 온세라를 내리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때 내 말을 들었더라면 나도 네가 이렇게 나올까 봐 두렵지 않았을 거야. 최서진이 너를 싫어하니 차라리 나를 따라...”
온세라는 절망했고 고개를 흔들며 소파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몸을 떨었다.
사실의 진상은 간단했다, 욕망에 눈이 먼 체육 선생님이 벙어리 학생에게 성희롱하려다 실패했고 진실을 감추기 위해 고자질하는 연극을 연출했다, 학교에 난리가 났지만 아무도 진실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구경만 하려 했다.
이젠 최서진조차 그녀를 믿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자 온세라의 두 눈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휘둥그레졌다.
‘오지 마...’
갑자기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이어 체육 선생님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온세라가 정신을 차려보니 체육 선생님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그 음흉한 얼굴도 누군가의 발에 짓밟혔다.
“아아악!”
비명 속에서 체육 선생님의 오관이 비뚤어졌다.
구두를 따라 고개를 쳐든 온세라는 대뜸 멍해졌다.
남자의 차가운 얼굴은 흐릿했고 목소리도 크지 않지만 위엄이 있었다.
“아까 어느 손으로 내 여자를 건드렸어? 그 손을 분질러 버리겠어!”
최서진이였다.
‘멀리 가지 않았어?’
최서진은 맹효연더러 사무실 그림 뒤에서 미니카메라를 꺼내게 했다.
“대표님, 다 찍었어요.”
체육 선생님이 밖으로 끌려나가고 나서야 온세라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물끄러미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당신 줄곧 여기에 있었어요?]
앞에 있는 여인의 낭패한 모습을 보며 최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뉴스에는 허점이 많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 실질적인 증거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이 여자가 억울할 뿐이다.
‘억울?’
이 단어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최서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온세라는 최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진실이 밝혀지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소파를 잡고 일어서려고 애썼다. 그러나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낮은 비명을 들은 최서진은 손을 내밀어 부축해주었다.
최서진은 멍이 든 온세라의 무릎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까 다친 거야?”
온세라는 또 폐가 될까 봐 불안해하며 소파에 기대서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윤세라의 두 눈은 아직도 촉촉했고 수려한 얼굴은 창백하고 초췌해 보였다. 고통스럽지만 이를 악물고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모습이 더욱 불쌍해 보였다.
최서진은 가슴이 아팠다. 온세라가 떠나려고 일어서는 순간 양복 외투를 벗어 몸에 덮어주고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없이 안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