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4장

멀리서 울리는 잔잔한 종소리와 함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사찰 밖의 산 풍경도 마침내 뭇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박이서는 고개를 숙이고 돌담길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이건 뭐야?” 이때 불쑥 강윤아가 보리수 앞에 서서 그 위에 달린 소원 비단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서가 항상 즐거운 나날만 보내게 해주세요. 신도 박도준.] [이서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원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해주세요. 신도 박도준.] [이서가 이생에 무탈하게 살아가고 착한 사람들만 만나게 해주세요. 신도 박도준.] [우리 이서 평생 무사하고 평안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 강윤아는 비단에 적힌 소원들을 읽으면서 질투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다만 박이서는 이것들을 보더니 가슴이 움찔거리고 자연스럽게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해 지진으로 박이서는 줄곧 몸이 안 좋아서 하루가 멀다 하게 잔병치레를 해댔다. 그녀가 하루빨리 치유되길 바라면서 박도준은 매주 사찰에 찾아와 오직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란다는 소원을 적곤 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박도준이 적은 소원이 이토록 많아질 줄이야. 소원 비단은 여전히 이 나무에 걸려 있지만 박이서와 박도준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됐다. “남매가 엄청 애틋하네. 나만 소외된 기분이야.” 강윤아는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아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때 박도준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자상하게 말했다. “소외되다니, 넌 내 와이프야. 이서는 단지 동생일 뿐이고. 정 그렇게 거슬린다면 바로 사람 시켜서 이것들 다 치울게.” 곧이어 박도준은 부하더러 나무에 걸린 소원 비단을 전부 떼어내라고 했다. 비단이 하나둘씩 바닥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발자국까지 찍혔다. 박도준은 금세 새로운 소원을 적어서, 오직 강윤아만을 위한 달달한 멘트를 적어서 나무에 새롭게 걸어두었다. 그제야 강윤아도 활짝 웃으면서 의기양양한 눈길로 박이서를 쳐다보더니 일부러 걱정된 척하며 물었다. “도준 씨 이러면 이서 안 삐져요?” 이에 박도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동생이 어떻게 와이프보다 중요하겠어? 우리 윤아 이제 화 풀렸지?” 화가 다 풀린 강윤아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줄곧 운전석에 있는 박도준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박이서는 뒷좌석에 앉아 잠시 눈 좀 붙이려고 했는데 차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번쩍 떴을 때 귓가에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차가 갑자기 가드레일을 뚫고 여러 번 굴러가더니 결국 산골짜기에 갇히고 말았다. 박이서는 등받이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온몸이 좌석에 갇혀 있고 팔이 나뭇가지에 심하게 찔려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녀 옆에서 기절해있는 강윤아는 딱히 별문제 없이 놀라서 기절한 듯싶었다. 운전석의 박도준이 재빨리 창문을 뚫고 기어 나와 걸음을 휘청거렸다. 너무 아파서 질식할 것 같은 박이서와 이미 기절해버린 강윤아를 번갈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릴 뿐 강윤아를 덥석 업었다. “일단 윤아부터 데리고 가야겠어. 이따가 사람 보낼 테니 잠깐만 기다려.” 말을 마친 박도준은 박이서의 표정 따위 거들떠보지 않고 강윤아를 업은 채 부랴부랴 자리를 떠났다. 행여나 잘못될까 봐 안달이 난 얼굴로 허겁지겁 병원으로 향했다. 박이서는 이 남자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앞으로 더는 이 인간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오직 본인만을 위해서 살아가리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차가 뒤집혀서 황폐한 산골짜기에 갇혔을 때 그녀는 저도 몰래 그해 지진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폐허에 묻혀버렸고 어두컴컴한 지하에 홀로 갇혀서 꼬박 3일을 눈물로 지새웠다. 나중에 박씨 가문에 입양되고 나서도 매일 밤 똑같은 악몽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몸을 벌벌 떨면서 서글프게 울었다. 그때 박도준이 항상 가장 먼저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품에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이서야. 오빠가 있잖아.” “오빠가 있는 한 우리 이서 평생 상처받을 일 없을 거야.” 다만 이제 그가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을 두 눈 멀쩡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박도준은 끝내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팔에서 피가 점점 더 많이 흐르고 날도 어두워지는데 그녀를 데리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이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지막 한 가닥의 힘으로 고통도 무릅쓴 채 차 밑에서 겨우 기어 나왔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팔뚝에 꽂힌 나뭇가지를 뽑아버렸다. 그녀는 한 걸음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피와 눈물이 한데 뒤섞여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큰길까지 걸어 나가더니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났을 때 박이서는 병원 침대에 누워 손에 두꺼운 깁스를 하고 있었다.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지나가는 착한 행인이 자신을 구해서 병원까지 실어다 준 일이 떠올랐다. 한편 그녀가 입원해서부터 지금까지 박도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보러 온 적이 없다. 간호사가 말하길 그는 한창 강윤아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강윤아는 고작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는데 박도준은 병원 한 층을 통째로 대관하여 그녀를 편히 쉬게 했고 여러 전문의들까지 모셔왔다고 한다. 여기까지 들은 박이서는 무심코 팔 전체를 감싼 붕대를 바라봤다. 어느 해 박이서가 가벼운 감기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박도준도 지금처럼 전문의를 잔뜩 불러오고 그녀의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수중의 업무는 계속 뒤로 미루면서 말이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려 베개를 흠뻑 적셨다. 퇴원하던 날, 많은 친구들이 그녀를 마중 왔고 그 가운데는 한때 그녀에게 고백했던 남자애도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꽃다발을 바라보며 박이서는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 남자가 말까지 더듬으며 겨우 용기 내서 고백했다. “이, 이서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퇴원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사 왔을 뿐이야. 네가 곧 여길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어. 앞으로도 계속 잘 지내길 바라.” 박이서는 그제야 고마움을 표하고 꽃다발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곧 몸을 돌렸더니 박도준이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평상시엔 거의 화내지 않던 이 남자가 안색이 한없이 어두워진 채 싸늘한 눈길로 그녀의 손에 쥔 꽃다발을 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박이서는 마냥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대체 뭣 때문에 화난 걸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도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꽃을 다시 꽃병으로 옮겼다. 이때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박이서는 벽을 짚고 겨우 걸어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방문이 열리는 순간 날렵한 턱선의 한 남자가 그녀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박도준이었다. 그에게 마음을 들킨 이후로 둘 사이는 어느덧 꽁꽁 얼어붙은 살얼음판 같았고 박도준도 더는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찾아온 걸까? 이제 막 질문을 건네려고 할 때 박도준이 대뜸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예상치도 못한 제스처에 박이서는 놀라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가 그와 함께 소파에 넘어지고 말았다. 남자의 몸에서 배어나는 술 냄새에 박이서가 몸을 피하려고 했다. 바로 이때 박도준이 그녀의 턱을 잡고 몸을 기울이더니 가차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