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주소 이전을 마친 후 박이서는 동사무소에서 나와 무용단으로 향했다.
단장님 사무실에는 그간 무용단에서 수상한 상장과 무용수들의 사진으로 한쪽 벽면을 장식했다. 박이서는 감개무량하면서도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벽을 어루만졌다.
청춘도 여생도 전부 이 무용단에 바칠 거라 여겼는데 이토록 갑작스럽게 떠날 줄은 미처 몰랐다.
“이서야.”
이때 단장이 밖에서 들어오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10년이나 따르던 김지영 단장을 뒤돌아보자 박이서는 좀 전까지 억눌렀던 감정이 마구 북받쳤다.
그녀는 손을 꼭 잡고 겨우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단장님, 저 오늘 사직하러 왔어요. 다름이 아니라 친부모님한테서 연락이 왔거든요. 이제 부모님 따라 해외 나가서 살고 싶어요.”
김지영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박이서를 쳐다보다가 기쁜 마음에 활짝 웃었다.
“좋은 일이네! 그럼 해외 나가서도 계속 무용할 거야?”
김지영은 박이서가 겁이 많고 수줍음을 잘 타던 어린아이로부터 늘씬한 몸매의 소녀로 거듭나는 모습을 쭉 지켜봐 온 분이다. 그녀가 그동안 무용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도 누구보다 잘 안다. 무용은 그녀를 자신감 넘치게, 더 빛나게 해주었기에 이대로 포기하는 건 원치 않았다.
박이서는 벽에 걸린 각종 무용 사진들을 바라보며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무용은 언제나 저의 꿈이고 미래에요. 이대로 포기할 순 없죠. 앞으로도 계속할 겁니다.”
김지영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줄곧 박이서의 이런 단호함을 높이 샀기에 무용단 수석 자리에 앉히면서 장차 본인의 후계자로 양성하려고 했다.
다만 갑작스러운 변동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박이서는 부모님과 재회하기 위해 해외로 떠난다고 하는데 단장인 김지영도 딱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떠나게? 너 1년 동안 짰던 안무가 이제 곧 첫 공연을 앞두고 있는데 그동안 공들인 시간과 노력을 봐서라도 무대에서 한 번쯤은 보여주고 가야지.”
박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모님께 이미 말씀드렸어요. 우선 여기 일부터 다 마무리하고 가겠다고 했거든요. 아직 보름이란 시간이 남았으니 마침 그 안무를 마치고 떠나면 될 것 같아요.”
김지영은 그제야 안심하며 박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둘은 한참 더 얘기를 나눈 후에야 박이서도 안무실에 가서 계속 안무 연습에 몰입했다.
늦게까지 연습을 마친 박이서가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을 열어보니 강윤아가 아직도 집에 남아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들은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의논하고 있었다.
“어머님, 드레스랑 액세서리를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제대로 고를 수가 없네요. 이서가 대신 골라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나름 절친이라 걔가 제 취향을 잘 알거든요.”
강윤아가 이 말을 내뱉을 때 박이서가 마침 현관에 들어섰다. 이를 본 안해원이 재빨리 박이서에게 손짓했다.
“이서야, 너희 새언니가 드레스 고르기 힘들다고 하니 요 며칠 네가 함께 돌아다니면서 결혼 준비를 도와주렴?”
박이서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강윤아를 힐긋 바라보았는데 좀 전까지 활짝 웃던 강윤아가 글쎄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도발하는 듯한 표정으로 싹 바뀌어 버렸다.
이에 박이서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나 거절했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무용단 일로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보름 뒤에 곧 공연을 마쳐야 하고 또한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강윤아와 함께 쇼핑해줄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말을 내뱉은 순간 분위기가 싹 얼어붙고 박도준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보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한다는데 네 일은 잠시 내려놓으면 안 돼? 그냥 그렇게 해. 내일 내가 대신 휴가 내줄게!”
그가 만약 어른의 신분으로 박이서에게 강제 휴가를 내준다면 박이서도 딱히 거절할 권리가 없다.
그녀는 쓴웃음만 지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박이서는 마지못해 수중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강윤아와 함께 열심히 결혼 준비에 돌입했다.
강윤아가 백화점에 가서 대충 고르면 될 줄 알았더니 이 여자가 글쎄 성남에서 성북까지 모조리 돌아다니면서 웨딩드레스는 막론하고 헤어핀까지 일일이 박이서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박이서가 그녀더러 사람을 시켜서 박도준에게 여쭤보라고 할 때마다 강윤아는 투덜대기만 했다.
“너희 오빠가 뭘 알아? 나한테 돈 주는 것 말곤 아무것도 몰라. 그래도 우리 이서밖에 없다니까.”
“지난번에 함께 결혼반지 고르러 갔는데 아니 글쎄 진열장의 반지를 싹 다 우리 집으로 보내면서 마음껏 고르라고 하는 거야.”
강윤아는 거울 앞에서 각종 헤어핀을 착용해 보면서 푸념했지만 자랑질하는 그 눈빛은 속일 수가 없었다.
박이서는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 그녀가 바라는 어떠한 피드백도 없었다.
이에 강윤아가 입술을 깨물고 뭐라 더 말하려 했는데 문 앞에 문득 박도준이 나타났다.
“도준 씨! 여긴 어쩐 일이야?”
박이서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볼 때 강윤아는 어느새 박도준에게 달려가 품에 와락 안기더니 가벼운 키스까지 날렸다.
박도준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상하게 답했다.
“절에 가서 기도드리고 싶다며? 반차 내고 너 픽업하러 왔지.”
둘은 또 나지막이 뭐라 속삭였는데 강윤아의 볼이 대뜸 빨개지고 남자의 품으로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이때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또다시 돌아와 박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도 요 며칠 줄곧 나랑 함께 있었어. 우리 다 같이 갈까?”
한편 박도준은 박이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강윤아가 산 물건들만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윤아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