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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임지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시월을 바라보았다. “네 남편 잘 간수해. 별일 없으면 다른 여자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 임시월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을 붉혔다. “너...” 고상준은 옆에서 그녀를 달래주었다. “시월아, 임신한 몸인데 그렇게 화를 내면 건강에 안 좋아. 오늘 임지연한테 제대로 설명하려고 찾아온 거야.” 앞뒤고 다른 인간이었네! 두 사람의 연기를 지켜볼 마음이 없는 임지연은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그리고 이내 고상준이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육진우하고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한 건지... 육진우하고는 그저 거래일 뿐인데 말이다. 잠시 고민을 하던 임지연은 모레 육진우 집에 들르는 기회를 빌어 제대로 상의해 볼 마음이었다. 그녀하고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볼 계획인 것이다. 지금은 일단 황인호를 안정시켰으니 임건국도 그녀를 귀찮게 할 일이 없다. 며칠 동안은 잠잠할 것이다. ‘따르릉~’ 휴대폰 벨 소리였다. 임지연은 전에 연락했었던 의사의 번호라는 걸 확인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남서우 씨인가요?” 전화 너머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서우는 그녀가 밖에서 외과의사로 일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네, 병원 쪽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남서우 씨, 도성 병원에서는 남서우 씨를 환영하기는 하지만 자그마한 조건이 있대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아는 임지연은 놀라지도 않았다. “말씀하시죠.” “도성 병원 쪽에서 매달 선생님이 며칠씩만 진료를 받아줬으면 해요. 그것만 허락해 준다면 할아버지의 병원비는 전부 무료일 거예요. 그리고 급여 또한 원하시는 액수를 말씀해 주시고요.” 남서우의 명성은 전체 의학계에서도 유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의학계 태두 백의의 관문 제자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백의와 함께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제를 개발해 환자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줬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도성 병원에서 진료를? 임지연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애초에 그녀한테 높은 급여를 주겠다며 이러저리 초청을 하는 병원이 수두룩하기는 했으나 할아버지의 다리가 불편하기도 하고 시골에 한평생 살았던 할아버지는 기어코 시골을 떠나려 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녀 또한 할아버지의 옆을 지키느라 시골에 남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할아버지의 몸이 약하다 못해 장기마저도 점점 쇠약해져 그녀는 돈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임지연은 심호흡을 하고 잠시 고민한 끝에 답을 했다. “그래요. 다만 해성시에서 해결해야 될 일들이 좀 남아 있어서 그러니까 몇 달 뒤에야 도성시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이 오시기만 한다면 시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럼 할아버지는 언제쯤이면 도성시로 옮겨갈 수 있을까요?” 임지연이 계속하여 물었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는데 머릿속에 온통 돈하고 권력뿐인 임건국은 할아버지한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성시에 도성 병원의 분원이 있거든요. 먼저 그리로 가셔서 모든 검사를 마치고 안정된 뒤에 도성시로 올 수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의 상태도 매우 허한 터라 섣불리 먼 길을 거쳐 도성시로 가다 보면 중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요. 최대한 빨리 할아버지를 옮겨주시기 바래요.” 임지연은 그 사람한테 모든 일들을 자세히 분부하고 나서 통화를 끊었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일이 풀릴 줄 몰랐던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자 가슴에 맺혔던 담담함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임씨네 가문에서 더는 할아버지로 협박할 수가 없으면 그녀도 참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임지연은 아침 일찍 할아버지의 전원 수속을 밟았고 밤늦게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임시월의 의미심장한 말들이 울려 퍼졌다. “아빠, 쟤 좀 봐. 하루가 멀다하고 늦게 돌아다녀. 밖에서 어떤 남자들하고 놀아난 건지 몰라. 만일에라도 황인호 대표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화나겠어.” 임건국은 고개를 돌려 그녀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임지연,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경고했지! 여편네가 어디 밤늦게 자꾸 싸돌아다녀.” 임지연이 마음에 드는 황인호가 준 돈으로 임씨네 가문은 급한 불을 끄게 되었다. 임지연은 무덤덤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녀한테 있어서 임건국은 그저 피가 섞인 남남이나 다름없었고 할아버지의 일들도 다 해결이 되었으니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입에 바른 소리 그만하지 그래요. 여태껏 나한테 신경을 써준 적도 없으면서 왜 이제 와서 참견인데요?” 차분한 말투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임건국은 줄곧 말을 잘 듣던 임지연이 갑자기 반박을 하자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손짓을 하려고 했다. “어디 버릇없이! 너 지금 그게 아버지한테 할 소리야!”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임지연은 성큼성큼 걸어와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 “손찌검을 할 수 있겠어요? 황인호한테 욕먹을까 봐 겁이 나지 않나 봐요?” 임건국은 그 말에 동작을 멈추게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임지연이 임씨 가문의 목숨줄이라 손찌검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는 손을 뿌리치더니 악랄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황인호의 눈에 든 걸 감사한 줄이나 알아. 그리고 얌전히 있어.” 임지연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황인호한테 시집갈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저녁이 되어 육진우한테서 메시지가 도착했고 시간을 오후 4시로 변경했다고 했다. 임지연은 알겠다고 답장했다. 다음 날 점심이 되어 육진우는 제때에 도착했고 임지연은 임씨네 가문으로부터 신호등 두 개가 걸리는 곳에 서 있었다. 손에 물건을 잔뜩 챙긴 그녀는 신속하게 차에 올랐다. 육진우는 그 물건들을 힐끔했더니 전부 건강기능식품 같은 것들이었다. “선물은 제가 다 준비했는데 뭐 하러 직접 사고 그래요.” 임지연은 헛기침을 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머니 선물이 아니라 육진우 씨한테 주려고 준비한 거예요.” 그 말을 내뱉으며 눈빛이 흔들리는 그녀는 육진우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부부 사이인데 육진우 씨 건강을 신경 쓰는 게 뭐 나쁠 건 없잖아요.” 육진우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 신호등이 걸리고 나서야 임지연의 손에 들린 물건들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임지연 씨한테는 제가 그 정도로 부족해 보여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 육진우의 말투가 살짝 잠겨 있었다. “콜록!” 임지연은 난감한 듯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육진우의 준수한 얼굴이 흐려졌다. “제 건강을 이토록이나 신경을 써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 차라리 직접 확인해 보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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