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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임지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록 육진우하고 결혼한 건 맞지만 연인 사이의 이런 행각들에 대해서는 그녀의 머릿속은 말끔한 백지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녀는 애써 해명을 하고 있었다. “제가 의술을 조금 알고 있는데 장기적인 소모는 사람의 건강을 해치잖아요. 게다가 이 물건들도 건강에 도움이 되고 하니까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뜩이나 흐린 얼굴이 완전히 새까매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바닥이 계속하여 조여져만 가자 뼈의 매듭이 보일 정도였고 육진우는 질주 운전을 하다 산 중턱에 있는 별장 앞에 차를 세웠다. 거의 차가 멈추자마자 그의 커다란 몸이 가까이로 달라붙었고 준수한 외모가 코앞에 보이게 되자 임지연은 긴장한 나머지 숨을 죽였다. “왜요? 저를 걱정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육진우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까이 붙은 거리로 인해 그가 말하는 동시에 따뜻한 숨결이 뿜어져 나와 임지연은 귀가 빨개져 갔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굳이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 남자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눈동자 속의 까만 것이 마치 번진 먹물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정도였다. 육진우는 더욱 앞으로 다가왔고 두 사람의 코끝이 마주치자 임지연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어느 남자와 이토록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제... 제가...”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고 육진우는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줬다. “할머니한테 가요.” 육진우는 곧장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임지연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날 농락한 건가? 미리 차에서 내린 육진우는 트렁크에서 몇 상자의 물건을 손에 들었고 임지연은 빨개진 자신의 얼굴을 더듬다 이내 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건 고풍스러운 3층 별장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커 보이지 않았지만 부지가 꽤 넓었고 앞에 배치된 작은 정원을 누군가가 정리하고 있었다. 임지연은 의아해졌다. 비록 도시 중심에 위치된 건 아니긴 하나 넓은 부지로 보아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육진우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임지연은 그제서야 황홀함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 남자의 커다란 손에서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임지연이 멍하니 넋을 잃고 있자 육진우가 설명했다. “할머니한테 우리가 열애 중이라고 말씀드렸거든요.”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육진우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알겠어요. 저도 열심히 해볼게요.” 육진우는 임지연하고 함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정원을 정리하던 사람은 마흔 살 정도 돼 보이는 뚱뚱한 아저씨였다. 그 남자는 육진우하고 한 여자가 나란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도련님, 오셨어요. 어르신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육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육진우가 남자 모델 아니었나? 왜 부잣집 아들인 것만 같지? 방에 들어가기 전 임지연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술집에서 일하는 모델 아니에요? 그런데 왜 여기에서 사는 거예요? 집에 하인까지?” 육진우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답했다. “제가 거기에서 일등 공신인 것 같다면서요? 부자인 게 뭐 이상한가요?” 음... 그녀는 이 직업의 수입을 과소평가했나 보다. 육진우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전에 그가 정아 호텔에 드나들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가 모시는 재벌 사모님이 기분이 좋을 때 자동차던 집이던 스스럼없이 선물로 줬을 수도 있다. 필경 육진우는 잘생겼다. “그냥... 그 일로... 이렇게 돈을 잘 벌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임지연은 고민을 한 끝에 느릿느릿 이 말들을 꺼내고 있었다. “왜요? 지연 씨도 직장을 옮겨보게요?” 육진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반농담식으로 답했다. 임지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못해요.” “할머니가 안에 있으니까 이따가 이상한 말들은 하지 말아요.” 육진우가 귀띔을 해주자 임지연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직종이 겉보기에는 호황 찬란해 보이긴 하나 어디다 대놓고 밝히기엔 다소 껄끄러운 것이다. “알았어요.” 두 사람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르신이 배웅을 나왔다. “진우 왔어! 이분이 내 손자며느리야?” 어르신은 임지연을 보고 났더니 눈빛이 반짝거렸다. 임지연은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고 하얀 머리를 하고 있는 어르신은 짙은 색의 장삼을 입고 있는 게 인자함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몸이 편찮으신 건지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네, 저는 임지연이라고 해요. 며칠 전에 진우 씨하고 혼인신고를 마쳤고요.” 육진우는 손에 든 물건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지연이가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어르신은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짙어지더니 임지연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전에 전화에서는 일부러 이 할머니 기분을 좋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 줄 알았어. 그래서 오늘 민정국에 가서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 거 있지! 착해 보이네! 네가 좋아할 만해!” 어르신은 임지연을 데리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냥 지연이라고 부를게. 우리 진우가 성격이 워낙 까칠해서 사람을 달래줄 줄을 잘 몰라. 혹시라도 진우한테서 상처를 받거나 하는 일 있으면 이 할머니한테 말해. 할머니가 지연이 대신 이놈을 야단쳐 줄게.” 어르신은 임지연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예쁜 외모에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 물론 눈빛이 맑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젊었을 때 육씨네 가문을 장악했었던 어르신은 상업적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봤었던 터라 한눈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으로 가늠이 가는 것이다. 임지연은 고개를 숙이고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진우 씨가 저한테 잘해요. 저한테 상처 주거나 그러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라는 호칭을 듣고 나자 어르신을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진우 이 녀석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네. 지연아, 여기서 며칠만 더 있어 주면 안 될까? 이 할머니 말동무도 해주고 말이야.” 임지연은 순간 난감해졌다. 그녀가 밤새 돌아가지 않으면 임씨네 그 집안 사람들이 또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모른다. 비록 할아버지가 병원을 옮기긴 해서 임씨 집안 사람들이 그녀를 괴롭힐 만한 꼬투리가 없긴 하지만 혹시라도 일이 커지면 육진우한테 불똥이 튈 수가 있다. 어르신은 임지연이 머뭇거리는 걸 보고 강요하지 않았다. “해성시에서 며칠만 있다가 할머니는 돌아가야 돼. 어려서부터 내가 우리 진우가 커가는 걸 지켜봤었어. 이 할머니는 그냥 우리 지연이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서 그래. 다만 다른 사려가 있는 거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어르신은 그 말을 하며 손목에 있던 팔찌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 팔찌는 응당 진우 어머니가 너한테 전해줘야 되는 건데 진우 어머니가 여기에 없으니 내가 대신 주는 거야. 앞으로 넌 우리 육씨 가문의 손자며느리니까 무슨 일이 있던 간에 육씨 가문이 늘 네 뒤를 지키고 있다는 걸 기억해.” 감동을 받은 임지연은 코를 훌쩍거렸다. 육진우가 권력도 세력도 없는 모델이기는 하나 어르신의 하는 말들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진 것이다. 할아버지가 병세가 위독해진 뒤로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어르신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안색이 급변해지더니 허리를 굽혀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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