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한편 차윤서는 그녀의 말을 새겨듣지도 않았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이곳을 떠날 테니까. 하지만 휴대폰을 거둬들이고 머리를 들었더니 송이나가 정면으로 마주 왔다.
“도하야!”
박도하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송이나는 웃으면서 대놓고 그에게 애틋한 눈빛을 보냈다.
“너 찾으러 왔지. 나 오늘 너한테 엄청 중요하게 할 얘기 있어.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이미 우승권을 거머쥐었다고 여유를 부릴 때 박도하가 침묵했다.
그는 옆에 있는 차윤서를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다음에 다시 얘기해.”
송이나는 못 믿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예기치 못한 거절에 서러움이 북받쳤고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오케이! 네가 먼저 거절했으니 두 번은 없어!”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도로 한복판으로 달려갔다.
당황한 박도하가 이제 막 그녀를 향해 소리치려고 할 때 차 한 대가 그녀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박도하는 눈앞이 아찔거렸다. 그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허겁지겁 뛰쳐 가서 송이나를 옆으로 밀쳤다.
곧이어 쾅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도하 씨!”
차윤서의 얼굴에 피가 튀겼고 송이나는 맞은편에 서서 엉엉 울뿐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결국 차윤서가 구급차를 불러서 박도하를 병원까지 실어갔다.
그의 친구들이 부랴부랴 달려와서 수술실 앞에 서 있는 차윤서를 보았는데 두 손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어떻게 됐어? 이나는?”
“도하 씨는 수술 중이고 송이나는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의사가 내쫓았어.”
그녀는 침착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마침내 수술 중이라는 조명이 꺼지고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마스크를 벗고 안에서 나왔다.
“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환자분은 내일쯤 깨어나실 거예요.”
박도하의 친구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오늘 박도하가 다친 걸 생각하니 차윤서도 제쳐두고 하나둘씩 의논하기 시작했다.
“도하 전에 학교 다닐 때도 이나 때문에 싸우고 그러더니 이제 하다 하다 목숨까지 내거는 거야? 이번에 수술이 잘 됐으니 망정이지 심장 수술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설쳐대 진짜?”
“이제 목숨까지 내다 바쳤으니 이나도 그만 우리 도하 마음 받아줄 때가 됐어. 이번 일로 액땜했다 치고 제발 좀 행복했으면 좋겠다...”
차윤서는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다가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이때 마침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찌질이, 어디 가? 도하 곧 나올 텐데 병간호 안 할 거야?”
고개를 돌리자 몇몇 남자들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다 이혼한 마당에 내가 뭣 하러?”
“뭐라고?”
장내가 충격에 휩싸였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고 차윤서는 그들을 무시한 채 가방에서 이혼 서류를 꺼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쥐여줬다.
“오늘 원래 이거 주려고 나갔다가 이 사달이 났어. 내일까지 못 기다리니 너희들이 알아서 전해줘.”
말을 마친 그녀는 뭇사람들이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쿨하게 병원을 나섰다.
박도하의 친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야, 어디 가? 차윤서!”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보다시피 송이나한테 자리 내주는 거잖아!”
“아참, 대신 축하한다고 전해줘. 두 사람 결혼식은 참석 못 할 것 같아.”
병원을 나선 차윤서는 곧게 별장으로 향했다.
이제 곧 진짜 기증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하준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기대가 점점 커졌다.
짐 정리를 마친 후 별장에서 택시를 잡고 공항으로 향했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