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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박호국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이다빈이 그의 발을 눌렀다. “뭐예요?” 박현우가 의아하게 물었다. 성도섭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박호국은 이다빈의 정체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말하지 말라는 뜻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어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게다가 이 계집애는 지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쿨럭쿨럭!” 박호국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다빈이의 신분은 내 미래의 며느리야. 내가 정한 사람이고! 그리고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말할 자격은 있고? 너 이제 27살이야. 네가 늙었다고 싫어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런데 네가 뭔데 다빈이를 거부해? 됐고, 당장 사과해!” 박현우는 입을 달싹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네. 내 말이 상처가 됐을지 모르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겠어.” 이다빈은 손에 쥔 귤을 삼킨 뒤 느긋한 자세로 담담하게 말했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으니까요. 그쪽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나와 비교하면 한참 멀었죠. 그러니까 저도 알려줄게요. 그쪽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차분하던 박현우의 눈빛에 순간 파도가 일렁였다. 이다빈을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엄숙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성도섭도 이다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 “됐어, 됐어. 두 사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 같은 늙은이가 안중에도 없어?” 박호국은 초조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계집애야, 나와 한 약속 잊지 마. 내가 너의 가족을 구했으니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다 들어주겠다고 한 거.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내가 결정한 대로 해!” 이다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 박호국은 박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때 엄마아빠가 매일 공부하라고 독촉한 거 잊었어? 빨리 회사에 와서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불필요한 부분은 굳이 신경 써서 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때 내가 뒤에서 너를 지지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마음 놓고 바둑 시합을 참가할 수 있었겠니? 그때 나와 한 약속 잊지 않았지? 내가 엄마아빠를 설득해 너를 바둑 시합에 참가하게 하면 앞으로 내 말을 들을 거라고 했잖아. 왜 인제 와서 말 바꾸려는 거야?” 박현우도 말문이 막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순식간에 거실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박호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억지로 시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거. 그러니까 강요하지 않을게. 우리 서로 양보하고 이렇게 하자꾸나. 약혼부터 해, 그리고 나중에 정 안 맞으면 다시 얘기하자.” 이다빈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기한을 정해야겠어요.” “그래, 그럼 10년. 10년 후에 너희들이 함께 지내다가 여전히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만둬.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박호국이 말했다. 이다빈은 어이가 없어 박호국을 흘끗 바라봤다. “할아버지, 차라리 50년이라고 하지 그래요?” 박호국은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 “그래! 네가 50년이라고 하니 그럼 50년으로 해!” 이다빈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이 늙은 영감탱이는 분명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한 달, 한 달 뒤 우리 다시 남이 되는 겁니다.” 이다빈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한 달? 너무 짧은 거 아니야? 현우야, 네가 말 좀 해봐.” 박호국이 박현우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박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한 달로 하지.” “약속지시세요.” “그래, 약속.” 이다빈과 박현우는 이런 부분에서 의외로 의기투합이 되었다. 이런 모습에 박호국만 안달이 날 뿐이다. “휴…” 그는 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더 이상 말하기 곤란하구나. 내가 약혼날짜를 정하고 알려줄게.” “네.” 이다빈은 박호국의 말에 대답한 후, 시간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저녁 먹고 가, 안 가면 더 좋고.” 박호국이 그녀를 붙잡았다.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걱정할 거예요.” 이다빈의 말에 박호국도 더 이상 그녀를 잡지 않았다. 성도섭은 이다빈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며칠이나 집에 안 들어갔다고? 저 여자 아직 학생 아니에요? 아픈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휴가를 많이 내도 돼요? 아니면 휴가도 안 내고 결석한 것은 아니죠? 할아버지, 어떻게 박씨 집안에 이런 며느리를 들일 수 있어요. 일부러 도련님을 불구덩이에 들이미는 거예요?” “네가 뭘 알아!” 화가 잔뜩 난 박호국은 수염까지 미세하게 떨며 말했다. 박호국이 이렇게 이다빈을 감싸는 것을 보자 성도섭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참!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어!” 성도섭은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박현우를 쳐다봤다. “전에 나더러 찾으라고 했던 바둑계의 고수 이 고수와 연락이 닿았어.” “정말?!” 잔잔하던 박현우의 얼굴이 활기를 띠었다. 바다처럼 깊은 검은 눈동자마저 숨길 수 없는 광채를 내뿜었다. 성도섭은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역시 넌 바둑 얘기를 해야 사람다워지는구나, 너 거울 좀 봐. 이제 겨우 20대인데 매일 늙은 아저씨처럼 그게 뭐야. 지금 이 얼굴이야말로 비로소 활기가 넘치는 젊은이 같잖아.” “쓸데없는 말이 왜 그렇게 많아! 언제 이 고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인데? 나와 한 판 는 거 그쪽도 괜찮대?” 박현우는 오롯이 바둑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 고수 본인과 연락한 것은 아니고 주변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했어. 요즘 이 고수가 바빠서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다면서 조만간 일이 끝나면 얘기해주겠다고 했어.”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박현우는 주먹을 꼭 쥐며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 이씨 가문. 집사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사모님! 큰 아가씨가 돌아왔어요!” “뭐라고? 어떻게 돌아왔지?” 밥을 먹던 나효심과 그녀의 남편 이경환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현관으로 들어온 온 이다빈은 운동화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효심은 그릇을 내려놓고 서둘러 이다빈 앞으로 다가갔다. “경찰에 끌려간 거 아니었어? 어떻게 돌아온 거야? 설마 탈옥했어?!” 나효심은 이 같은 자신의 추측에 점점 더 놀라는 얼굴이었다. 이경환 역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다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진짜 탈옥한 것은 아니지? 내가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너의 죄까지 감쌀 수는 없어. 스스로 자수하는 것이 좋을 거야. 만약 네가 가지 않는다면 나라도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어. 다 너를 위해서니까.” 이다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범죄를 저지른 적도 탈옥한 적도 없어요.” 이경환의 얼굴이 다시 싸늘해졌다. “진짜 자수하지 않을 거야?” 이다빈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다빈이 말을 듣지 않자 이경환은 휴대전화를 들고 ‘112’ 세 숫자를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신고 좀 하려고요. 제 딸이 이틀 전에 경찰들에게 끌려갔는데 다시 집에 몰래 돌아왔어요. 자수하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아서요. 제가 대신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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