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강기준의 휴대폰 화면에는 방금 막 전송된 알람이 떠 있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후배가 그의 신청을 거절한 것이다.
그는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나를 거절한 사람은 처음이군.”
마침 커피를 들고 들어온 비서 조준혁은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보다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대표님, 설마... 후배분이 거절하신 겁니까?”
‘강 대표님의 친구 요청을 거부하다니, 세상에...’
그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역력했지만 곧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고 조용히 서 있었다.
강기준은 커피를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금세 얼굴을 찌푸렸다.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조준혁이 얼른 물었지만, 강기준은 커피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을 떠올리며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 정라엘이 내려준 커피가 떠오르는군.’
그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했다.
“0이 열 개 들어간 수표 한 장 준비해. 그걸 정라엘 이혼 보상금으로 줄 거야.”
3년 동안 함께 지냈다지만, 그녀가 무일푼으로 나가겠다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다.
시골 출신에 16살 때 학교를 관둔 사람이 무슨 경제력이 있을까. 결국 밀당 식으로 더 많은 돈을 요구하려고 하는 거라 보았다. 그러니 그는 한 번에 깨끗이 정리해서 더는 빚지고 싶지 않았다.
조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
바로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더니 환한 표정이 되었다.
“대표님, 좋은 소식입니다! 제이 신의님께서 정아름 씨 심장 수술 건을 맡아주시겠답니다!”
강기준은 전설로 불리는 제이 신의라는 인물을 알아보기 위해 매번 애썼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섭외에 성공한 셈이었다.
어릴 적부터 심장병을 앓은 정아름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이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름이한테.. 이젠 살길이 열리겠어.’
...
다음날, 한의원.
정라엘은 전날 받은 일정에 따라 병원으로 갔다.
그녀가 맡게 된 수술 건이 있어 방문한 것이었는데, 로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웅성거렸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보디가드들이 길을 터 주고 환자와 방문객들이 양옆으로 밀려나는 광경이 펼쳐졌다.
옆에서는 두 여자의 대화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로운시의 붉은 장미, 수석 발레리나인 정아름이 춤 연습 중 심장이 안 좋아졌대. 강 대표가 직접 데리고 진찰받으러 온다고 하더라.”
“우와... 강 대표가 움직여서 이렇게 된 거구나.”
정라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여기서 강기준이랑 정아름을 만나게 될 줄이야...’
“봐봐, 강 대표랑 정아름이 왔어!”
수군대던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눈앞에서 강기준이 나타났다. 맞춤 제작된 검은 수트 차림에, 크게 뻗은 어깨와 긴 다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아름을 공주님 안 듯 안고 있었다. 간호사와 의사들은 잰걸음으로 앞장서며 안내했다.
“강 대표님, 이쪽으로 오시죠.”
그의 주변은 별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저거 봐, 진짜 재벌 대표님 느낌! 너무 멋있다.”
“정아름도 정말 예쁘네. 발레리나라 그런가 분위기가 달라.”
“딱 어울리는 커플이다.”
정라엘은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세상 누구도 강기준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둘은 법적 부부였으나 이를 아는 건 극소수뿐이다.
사람들은 강기준과 정아름의 사랑이 최고의 로맨스라며 환호하고 있었다.
‘역시... 난 저 둘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니구나.’
정라엘은 묘한 씁쓸함을 삼키고 휴대폰에 뜬 예약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109 VVIP 병실로 향하는 동안 점점 한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병실 문 앞에 도착해 안을 보니 거기에는 강기준, 정아름, 그리고 정성호 부부가 있었다.
정아름은 침대에 앉아 있고, 부모인 정성호와 이정아는 양옆에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달래 주는 모습이었다.
“아름아, 역시 강 대표가 대단하지. 제이 신의를 모셔 올 줄이야.”
“우리 아름이가 얼마나 고생했니. 이제야 방법을 찾았구나. 수술 잘 받고 완치하면 강 대표랑 결혼도 할 수 있을 거야.”
정아름은 그런 부모님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눈길은 자동으로 강기준에게 향했다.
강기준은 묵묵히 곁에 서서 그녀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장면은 한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문밖에 선 정라엘은 온몸이 굳는 듯했다.
‘설마... 사부님이 잡아 준 심장 수술 대상이 정아름이었다니... 세상도 참 좁다.’
왠지 가슴 한켠이 매캐하게 아파 왔다. 그리고 그 순간 강기준이 느닷없이 이쪽을 돌아봤다.
위험하고 깊은 눈동자가 문가에 선 정라엘을 딱 포착했다. 정라엘은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시선과 부딪혔다.
강기준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서너 걸음에 훌쩍 다가왔다.
“정라엘, 너 여기서 뭐 해?”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
정라엘은 말문이 막혔고, 강기준은 더 날카롭게 물었다.
“스토킹하는 거야? 우리를 따라왔어?”
“아... 아니...”
이때 정성호와 이정아도 문 쪽을 보며 인상을 썼다.
“라엘아, 왜 하필 오늘이야. 오늘은 우리 아름이가 제이 신의한테 진료받으러 온 날이야. 이런 날까지 소란을 부려야겠어?”
“거 참, 눈치도 없구나. 당장 나가!”
정아름은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병상에 앉아 새하얀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올 곳이 아니지 않느냐는 시선이었다.
그 사이 강기준이 성큼 다가오더니 정라엘의 가는 팔을 험하게 잡아채며 쏘아붙였다.
“정라엘, 밀당이 지겹지도 않아? 이번엔 스토킹으로 날 귀찮게 굴겠다는 거야? 꺼져, 시간 낭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