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정아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렸다. 마음 한구석은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살며시 몸을 풀어 강기준의 품에 기대더니 곱고 작은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역시 기준 씨는 날 버리지 못해. 날 필요 없다고 하지 않을 줄 알았어.”
로운시 최고 재벌, 잘생기고 기품 있는 데다 강력한 권세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남자. 그가 바로 강기준이었다.
그는 그녀가 남자에게 바라는 모든 환상을 충족시켜 줬다. 하지만 3년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의사들도 평생 못 깨어난다고 진단한 그에게 정아름은 자신의 청춘을 바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망쳤다.
그러나 정라엘이 대신 시집간 뒤 불과 3년 만에 강기준은 깨어났다.
정아름은 아직도 그가 어떻게 깨어났는지 모른다. 정라엘의 사주팔자가 좋았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의사들도 의학적 기적이라 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강기준이 자신을 사랑하기에 절대 자신 없이 못 산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강기준은 정아름의 화사한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 일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이렇게까지 널 예뻐해 줬을까?”
‘옛날 그 일’이라는 말에 정아름은 순간 멍해졌고 눈빛에 약간의 불안감이 스쳤다.
정아름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근데 기준 씨 라엘 언니랑 잔 적 있어?”
강기준은 눈을 아래로 깔았다.
“걔랑 안 자면 너랑 자겠어?”
정아름은 그가 정라엘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냥 농담 삼아 되받아치는 것이었다.
정아름은 그가 지금 내보이는 성숙한 매력과 약간의 나쁜 남자 기질이 마음에 들었다. 단 한마디로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 말투가 좋았다.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으며 붉은 입술을 그의 얇은 입가로 가져가 낮은 목소리로 숨결을 불었다.
“나랑 자고 싶어?”
운전석에 앉은 조준혁은 오랫동안 강기준을 모셔 온 눈치 빠른 비서였다. 그는 재빨리 중간 칸막이를 올려 사생활을 보호했다.
강기준은 정아름을 조용히 바라봤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정아름은 끈 달린 붉은 원피스를 입고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타다시피 한 자세였다. 옷자락은 위로 말려 올라 새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말해 봐. 나랑 자고 싶어?”
그녀는 팔에 힘을 주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부추기기 시작해다. 그가 원한다 한마디만 하면 지금 당장 가능하단 뜻이었다.
강기준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븐 클럽에서 정라엘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기준 씨, 내 다리랑 정아름 다리 중에 어떤 쪽이 더 좋아?”
왜 이런 순간에 정라엘이 떠오르는지 강기준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손을 뻗어 정아름의 팔을 떼어 냈다.
“나 아직 이혼 안 했어.”
“... 그래서?”
“결혼 중에는 바람피울 생각 없어.”
“...”
달콤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기준이 멈춰 버린 것이다.
정아름은 대단히 언짢아 보였지만 자존심이 있어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그가 원해야 자기 자신도 허락해 준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 언니랑은 언제 이혼할 건데?”
강기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사실 정라엘이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건 잘 됐다 싶었다. 그도 그럴 예정이었으니까.
그는 냉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곧.”
....
한편, 정라엘과 서다은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정라엘은 포근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오늘 밤 충분히 놀았으니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라엘은 휴대폰을 꺼내 SNS를 열었다. 그녀의 계정은 두 개인데, 지난 3년 동안 강기준 아내의 계정만 써 왔다.
이제 그 계정은 완전히 로그아웃할 것이다. 정라엘은 다른 계정으로 로그인했다.
로그인하자마자 알림 소리와 함께 ‘우리는 패밀리’라는 단톡방이 분주해졌다.
큰 사부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우리 막냉이가 돌아왔다!]
둘째, 셋째 사부도 문자를 보냈다.
[돌아온 걸 축하해!]
[와서 안겨!]
이런 식으로 다들 호들갑스럽게 환영하는 메시지들이 올라왔다.
큰 사부가 말했다.
[3년 전 사랑을 찾아간다고 할아버지를 떠나더니... 어때, 재밌게 놀았어?]
정라엘이 답했다.
[재미없어요.]
[앗, 라엘이 실연한 듯? 하하하!]
셋째 사부도 거들었다.
[역시 라엘이라고 해도 못 이기는 남자가 있구나ㅋㅋㅋ]
[다들 라엘이 그만 놀려. 3년 동안 고생해서 액땜한 셈 치면 되지. 근데 좀 재밌긴 하다. 미안한데 좀 웃을게. 하하하하!]
정라엘은 말을 잃었다. 차라리 이 셋을 단톡방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결국 채팅방 이름을 ‘우리는 패밀리’에서 ‘우리는 원수’로 바꿔 버렸다.
그때 셋째 사부 소승준이 본론으로 돌아갔다.
[라엘아, 이제 제대로 일 시작해야지. 네 수술 예약이 밀려 있어. 내가 힘든 심장 수술 하나 잡아 놨으니 내일 병원으로 가 봐.]
정라엘은 알겠다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단톡방을 나서자, 새 친구 추가 요청이 하나 와 있었다. 확인해 보니 강기준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친구 신청을 해오다니, 이건 좀 우스웠다. 3년 동안 강기준 아내의 계정으로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 한 번 안 하던 그가 이제 와서 다른 계정으로 연락을 하다니 말이다.
‘예전엔 날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이제 내가 넘볼 수 없는 사람이 됐다는 뜻인가?’
정라엘은 하얀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버튼을 톡 눌렀다.
...
한스 그룹은 로운시의 랜드마크로, 이 도시 경제를 좌우하는 초대형 기업이었다.
회사 건물은 마천루처럼 치솟아 구름에 닿을 듯하며 밤이면 화려하고 웅장한 자태를 더욱 빛냈다.
정아름을 집에 데려다준 강기준은 대표이사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검정 가죽 의자에 앉아 서류를 결재하는 중이었다.
힘 있고 유려한 필체, 뒤쪽의 통유리에 비치는 도시의 빛들이 모조리 그의 배경인 듯 어른거렸다.
띵.
청아한 휴대폰 알람이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기준은 휴대폰을 들어 열어 봤다. 천재 후배가 답장을 보낸 게 틀림없었다.
그는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얇은 입술을 비틀며 코웃음 치듯 웃었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