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아무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저마다 그녀를 내쫓으려 들었다.
정라엘은 이 상황이 우스워 보였다. 차가운 눈동자를 번갈아 이정아, 정아름, 정성호 쪽으로 던지다가, 마침내 강기준의 손아귀에서 가느다란 팔을 홱 빼냈다. 그리고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가 나갈게.”
‘기억해. 당신들이 날 쫓아낸 거니까.’
정라엘은 돌아서 걸어 나갔다. 그런데 곧 다시 돌아오더니 얼굴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기준 씨, 나 오늘 한의원에 왜 온 건지 알아?”
강기준은 정라엘의 하얀 얼굴을 바라봤다. 그 위에 맑고 부드러운 솜털이 비쳐 한층 더 돋보였다. 하지만 그는 별 흥미가 없다는 듯 차가운 얼굴을 했다.
“정라엘, 짜증 나게 하지 마.”
정라엘이 갑자기 한 걸음 다가가 화사하게 웃었다.
“당신한테 한의사를 찾아주러 왔어.”
그러고는 작은 카드를 꺼내 강기준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
고개를 숙여 보니 누렇게 바랜 자그마한 카드가 있었다. 꼭 누군가 문틈으로 밀어 넣은 듯 보였다.
카드에는 ‘유명 한의사, 각종 불임 전문 치료. 전화번호: 010-****-****’라고 쓰여 있었다.
강기준의 잔잔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정라엘은 카드를 그의 양복 주머니에 쏙 넣으며 말했다.
“정아름만 아픈 게 아니잖아. 너도 병원 다녀. 둘 다 치료 잘 받아.”
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돌아섰다.
강기준은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갑자기 움켜쥐었다.
‘이 여자는 나를 화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이때 정아름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기준 씨, 그냥 넘어가. 굳이 언니 때문에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정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제이 신의는 왜 아직도 안 오지?”
제이 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긴장했다. 제이 신의는 정아름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강기준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이미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이 신의는 오지 않았다.
바로 이때 의료진이 들어왔다.
“강 대표님.”
정아름, 정성호, 그리고 이정아의 눈이 동시에 빛났다.
“제이 신의가 온 거예요?”
의료진이 강기준을 보고 말했다.
“강 대표님, 신의님은 이미 왔다가 가셨어요.”
“네?”
강기준이 바깥을 살폈지만 다른 사람은 안 보였다. 다만 저 멀리 섬세한 실루엣 하나, 정라엘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강기준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제이 신의는 못 봤는데...”
의료진이 덧붙였다.
“신의님은 분명히 왔다가 다시 가셨어요.”
“왜요?”
정아름, 정성호, 그리고 이정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이 신의가 왜 그냥 가버린 거예요? 아직 아름이 치료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의료진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신의님께서 더 이상 정아름 씨를 돕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정아름의 화사한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제이 신의가 날 안 도와준다고?’
조금 전의 기쁨이 한순간에 식어버리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아름은 절망스럽게 외쳤다.
“제이 신의가 왜 날 안 구해줘요? 왜?”
정성호와 이정아는 그녀를 얼른 부둥켜안고 달랐다.
“아름아, 진정해. 어떻게든 다시 제이 신의를 모셔볼게. 네 병은 꼭 나을 거야.”
강기준의 이목구비가 차갑게 굳었다. 텅 빈 복도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위험해 보였다.
...
한편, 정라엘은 한의원을 나섰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정라엘은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봤다. 상대는 이정아였다.
이정아는 여기까지 따라와서 정라엘 앞에 수표를 내밀었다.
“라엘아, 이거 받아.”
정라엘은 시선을 내렸다. 400만 원이 적힌 수표였다.
이정아가 말을 이었다.
“라엘아, 기준이는 널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더 이상 붙잡지 말고 네 동생한테 양보해. 왜 그렇게 못 해줘? 빨리 기준이랑 이혼하고 이 돈 들고 시골로 돌아가.”
정라엘은 어이가 없고도 씁쓸했다. 만약 몰래 이정아와 정아름의 DNA 친자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정아름이 이정아의 친딸인 줄 알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아름의 새어머니지만, 정아름만 사랑하고 친딸인 정라엘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듯했다.
정라엘은 이정아가 정성호를 사랑하기에, 그가 아끼는 정아름까지 함께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맑은 눈동자로 이정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한스 안주인 자리가 고작 이 정도예요? 아니면 제가 이만큼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정아는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라엘아, 엄마도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여긴 너한테 안 맞아서...”
‘엄마...?’
그 낯선 호칭에 정라엘은 미소를 지었다.
“저를 이미 한 번 시골로 보냈으면서 또 보내고 싶어요? 정말 제 엄마답네요.”
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이정아를 보지 않고 택시를 타고 떠났다.
...
택시 뒷좌석에 앉은 정라엘은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조심스레 포장을 벗겨 입에 넣었다.
운전석에 앉은 기사는 룸미러로 그녀를 바라봤다. 원피스를 입고 태연한 자태로 있는 것이 강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자세히 보면 피부 톤은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밝았다. 원피스 안의 몸매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처럼 가녀렸다.
기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딸 같은 마음이 들어 미소를 지었다.
“사탕 좋아하나 봐요?”
창밖으로 부는 바람이 그녀의 잔머리를 살짝 흔들자, 정라엘은 작게 미소 지었다.
“네, 달콤하면 쓰지 않으니까요.”
...
이정아는 그대로 굳어 서서 정라엘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바로 그때 한의원의 안준휘가 다가왔다.
“사모님.”
이정아는 돌아서며 급히 말했다.
“안 실장님, 안녕하세요. 여기서는 실장님 인맥이 제일 넓다고 들었는데, 우리 아름이를 위해 제이 신의를 다시 초빙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안준휘가 대답했다.
“이정아 씨, 제가 제이 신의를 잘 알아요. 연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정아는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고마워요, 안 실장님.”
안준휘는 방금 정라엘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사모님, 방금 그 아이가 시골에서 돌아온 큰딸이죠? 저렇게 예쁠 줄은 몰랐네요. 방금 천사가 지나가는 줄 알았어요.”
이정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담담하고 차가운 표정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