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고승호는 충격을 받은 듯 물었다.
“16살이라고?”
고승호 무리 사람들이 정아름을 크게 인정하는 이유가, 그녀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성적이 좋았고 학벌도 높았기 때문이다.
로운시 사교계 재벌가 딸 중에서도 그녀만큼 뛰어난 인물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녀라면 강기준과 어울릴 수 있다.
여자가 미모만 뛰어나면 별로지만, 미모에 학벌까지 뒷받침되면 최상급 조합이라고 본다. 상류 사회일수록 여자의 학력을 중시한다.
고승호는 정라엘에게 품었던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묻어났다.
“라엘 씨 진짜 16살 때 학교 그만둔 거예요?”
정라엘은 우쭐대는 정아름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네, 16살에 그만뒀어요.”
“근데 이거 진짜 묘한 우연이네요. 우리 형도 16살에 학교 그만뒀거든요. 하지만 우리 형은 하늘이 낸 신동이라 16살에 하스턴에서 복수 석사 학위를 받았어요. 완전 역사를 새로 썼죠. 라엘 씨처럼 16살 때 그냥 자퇴한 게 아니라고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으면서, 하하!”
고승호는 비웃음을 터트렸다. 정아름은 고개를 치켜세우며 우월감을 드러냈다. 둘 다 정라엘을 완전히 깔보고 있었다.
강기준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조명 아래서 차가운 인상의 얼굴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가만히 정라엘을 바라봤다.
3년 동안 정라엘은 전업주부처럼 그의 곁을 맴돌았다. 학력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녀는 별로 당황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정말 우연이네요.”
정말이지 묘한 우연이었다.
웬일인지 강기준은 순간 가슴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문득 정라엘의 눈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롱하고 밝아서 마치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라엘아!”
그 순간 서다은이 달려왔다. 그녀는 정아름을 보곤 화난 표정을 지었다.
“정아름 씨, 또 우리 라엘이 괴롭혔어요?”
정아름은 오만하게 대답했다.
“괴롭힌 거 아니에요. 저희는 언니한테 일자리 하나라도 찾아주려고 했다고요.”
서다은은 깜짝 놀랐다.
“라엘이한테 일자리를요?”
정아름은 은혜를 베푸는 투로 여유롭게 말했다.
“그래요. 아무리 무학력, 무학벌이라고 해도 최대한 괜찮은 일을 알아봐 줄 수 있어요.”
“...”
서다은은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라엘이가 누군지 알기나 해요? 라엘이는 사실...”
그러다 정라엘이 황급히 서다은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다은아, 됐어. 우리 가자.”
서다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두고 보자는 눈빛을 주고는 정라엘을 데리고 떠났다.
고승호는 화난 듯 중얼거렸다.
“정라엘 씨는 고등학교 졸업도 못 한 주제에 뭘 잘난 척해요. 나라면 부끄러워서 사람들 앞에 못 나왔을 거예요.”
정아름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아예 정라엘을 제 눈높이에 두지 않는다. 정라엘 정도에 화를 내는 건 자신의 격만 떨어뜨리는 일일 뿐이니까.
정아름은 고승호를 보며 웃었다.
“됐어요, 승호 씨. 무지하면 두려움도 없는 법이죠.”
“형, 빨리 정라엘이랑 이혼해. 형이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강기준의 얼굴엔 별다른 감정이 비치지 않았다. 그는 정아름을 보며 말했다.
“가자.”
정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아름과 고승호는 강기준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
이븐 클럽을 나서자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 대표?!”
강기준이 고개를 들었다. 알고 보니 아는 얼굴, 하스턴 대학원의 총장 셀린이었다.
강기준이 앞으로 나섰다.
“총장님, 로운시에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정아름은 셀린을 몹시 존경했다. 그녀가 아무리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고 해도 하스턴처럼 최정상급 학부에 갈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셀린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로운시에 세미나가 있어 잠시 들렀어. 마침 네 후배도 여기에 있더군요.”
강기준은 잠깐 멈칫했다.
“제 후배라고요?”
“그래. 우리 하스턴에 두 명의 전설이 있어. 첫 번째 전설은 너, 그리고 두 번째 전설이 바로 네 후배야. 너처럼 16살에 복수 전공 학위를 취득한 천재 소녀거든. 다만 기수가 몇 년 차이 나서, 넌 걔를 직접 만나지 못했을 거야.”
고승호는 호기심에 반짝 눈을 빛냈다.
“와, 우리 형이랑 비슷한 괴물이 또 한 명 있다고요? 그럼 누가 더 대단한 거예요?”
셀린은 강기준을 흘끗 보고 미소 지었다.
“막상막하지.”
강기준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는 아직 자신과 막상막하인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정아름 역시 강기준에게 이런 대등한 천재 후배가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터라 신경이 곤두섰다.
‘대체 누구지?’
셀린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강 대표, 내가 걔 연락처를 보낼 테니 친구 추가해 봐. 지금 로운에 있으니까 선배로서 잘 돌봐주면 좋잖아.”
강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셀린이 떠나자 고승호가 재촉했다.
“형, 빨리 연락처 추가해 봐. 나도 궁금하단 말이야! 대체 어떤 사람이지?”
강기준은 휴대폰을 꺼내 상대의 연락처를 확인했다. 닉네임은 영문 알파벳 하나 ‘L’였고 프로필은 온통 흰색이었다.
“L은 무슨 뜻이지?”
고승호의 질문에 강기준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강기준이라는 이름으로 친구 요청을 보냈다. 승인이 바로 되지는 않았다.
고승호는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형, 만약 그 후배가 친구 수락하면 나한테도 정보 좀 넘겨줘. 너무 멋있잖아!”
정아름은 두 사람의 관심이 모두 다른 사람에게 쏠리자 기분이 상했다. 마침 롤스로이스 비즈니스 밴이 도착했는데 운전은 강기준의 개인 비서 조준혁이 했다.
정아름은 이 화제를 빨리 끝내고 싶어졌다.
“기준 씨, 차 왔어. 우리 타자.”
“형, 형수님, 잘 가요!”
롤스로이스 비즈니스 밴이 도로 위를 부드럽게 달렸다.
조용하고 호화로운 차 안, 운전석의 조준혁은 룸미러로 뒷좌석의 강기준에게 공손히 물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회사로 가.”
정아름은 묵묵히 강기준을 바라봤다.
밤의 네온 조명이 반사되어 그의 얼굴 위로 흑백 영화처럼 흐르고 있었다. 고급스럽고도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정아름은 눈빛에 사랑이 어리며 말했다.
“기준 씨, 아까 라엘 언니랑 무슨 일이었어? 혹시 언니가 갑자기 예뻐져서 마음이라도 생긴 거야?”
강기준은 정아름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걔 내 아내야. 무슨 일 생겨도 이상할 거 없지. 애초에 네가 나한테 밀어준 거 아니었어?”
정아름은 그가 아직도 자신을 탓하고 있음을 느꼈다.
3년 전 그가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그녀는 해외로 떠났고 정라엘이 대신 결혼했다.
그 이야기에 대해 변명하고 싶었다.
“내가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라엘 언니가 갑자기 가로채서... 난 어쩔 수 없이 양보한 거였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정아름은 붉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심통을 부린 듯 말했다.
“3년 전에는 내가 기준 씨를 버린 거 맞아. 그게 신경 쓰인다면 우리 헤어져도 돼. 기준 씨가 나 싫으면 그만하자.”
그러고는 비서 조준혁에게 말했다.
“조 비서, 차 세워줘요!”
정아름은 당장 내리고 싶어 했지만, 강기준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단숨에 잡아 세차게 당겼다.
정아름의 유연한 몸이 그의 다부진 가슴에 부딪혔다. 머리 위로 남자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아름,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