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정라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강기준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누가 너더러 이렇게 야하게 입으래?”
‘... 하? 야하다고?’
“기준 씨,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제대로 말해!”
강기준은 아래로 시선을 떨구고 그녀의 미니스커트를 힐끔 봤다.
“네 허벅지 안쪽까지 다 보이겠더라. 사람들한테 네 다리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정라엘이 입은 치마는 좀 짧긴 했다. 이건 서다은이 골라준 옷이었다.
서다은은 아예 대놓고 말했었다.
“우리 라엘이가 그동안 다리를 안 드러내서 그렇지 정아름이 다 뭐야. 걔 잘난 척하는 거 원래도 마음에 안 들었어. 오늘 밤 모두가 누가 진짜 로운시 최고의 다리 미인인지 알게 해주자.”
정라엘은 섬세한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너도 내 다리를 봤나 보네.”
강기준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라엘은 벽에 몸을 기댄 채 한껏 나른하고 관능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려 물방울 크리스털 하이힐을 신은 발끝으로 그의 발목 부근을 스치듯이 문질렀다.
강기준은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있었고, 탄탄한 길고 큰 다리가 차가운 기품을 뿜어내며 묘한 금욕적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발목 부근에서 시작된 그녀의 하얀 발끝이 종아리를 타고 위로 오르며 은근히 애무하는 듯했다. 분명 의도적 유혹이자 도발이었다.
강기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뭐 하는 짓이야?”
정라엘은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미소 지었다.
“기준 씨, 내 다리랑 정아름 다리 중에 어떤 쪽이 더 좋아?”
강기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이마에는 짧은 애교머리가 드리워져 손바닥만 한 얼굴에 신비로운 매력을 더했다. 그리고 순수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청아함과 요염함이 뒤섞여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사실 어젯밤에도 그는 그녀의 뿔테 안경 뒤에 숨겨진 미모를 살짝 엿봤지만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 그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들게 했다.
정라엘은 투명한 물빛 눈동자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정아름이 다리로 널 유혹한 적 있어?”
강기준은 거친 숨을 짧게 몰아쉬며 얼굴을 그녀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싸늘하기만 했다.
“정라엘, 그렇게 문란하게 굴고 싶어? 어제부터 남자 생각만 하더니 오늘은 선수 8명이나 부른 거야?”
그가 정아름과의 일을 답하지 않는 건 어쩌면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했을지도 모른다.
강기준과 정아름은 한창 풋풋하고 아름답던 시절에 불꽃 같은 사랑을 했다. 아마 정아름 역시 그를 유혹한 적 있을 것이다. 그렇게나 오래도록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왔으니 말이다.
정아름은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정라엘은 생각했다. 이렇게나 차가운 남자가 그녀에게는 무한한 정을 주고 있었다. 문란하다는 단어도 역시 쓰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정라엘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지만 맑은 눈동자 속은 싸늘했다.
“그래, 기준 씨는 조건이 안 되잖아. 날 만족 못 시켜주니 당연히 다른 남자 찾으러 가야지. 우리 빨리 이혼해. 내 입장에서 생각해 봐. 난 무능한 남자를 빨리 바꾸고 싶어. 다음 남자는 나한테 더 잘해줄걸?”
정라엘은 또다시 자극적인 얘기를 꺼냈다. 다음 남자까지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 모습이 강기준의 눈에는 참 버릇없어 보였다.
강기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작고 갸름한 턱을 움켜쥐었다.
“이런 식으로 약 올리겠다는 거야? 그렇게 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알고 싶어?”
‘뭐지?’
정라엘은 잠시 멍해졌다.
강기준은 그녀의 붉은 입술 가까이로 얼굴을 댔다.
의미심장한 느낌만 살짝 풍기는 이 모호한 거리감에서도 말투는 역시 냉정했다.
“헛된 꿈 꾸지 마. 난 널 절대 건드리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이니까.”
그가 사랑하는 건 정아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벌에게 쏘인 듯 작고 뾰족하게 이어지는 통증이 가슴을 구석구석 찔렀다. 선명하게 아팠다.
그때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준 씨.”
정라엘이 고개를 들어 정아름을 발견했다.
정아름은 로운시의 붉은 장미로 붉은 입술을 가진 정형적인 미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워서 몸도 유연하고 나긋나긋했다.
강기준은 바로 정라엘을 놓아주고는 성큼성큼 정아름 쪽으로 갔다.
그는 잘생긴 눈꺼풀을 아래로 드리우며 정아름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정라엘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스함으로 가득했다.
“왔네?”
정아름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정라엘을 바라봤다.
“이분은...?”
정아름은 한순간 정라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정라엘은 결코 정아름을 잊을 수 없었다.
사실 정라엘과 정아름은 아버지가 달랐다. 정성호는 정라엘의 친아버지가 아니라 계부였다.
옛날 정라엘도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그때는 아버지 정성훈, 어머니 이정아와 함께 살았는데, 정성훈은 그녀를 사랑한 나머지 매일 안아 올리며 꼭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성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정성훈의 동생인 정성호가 딸 정아름을 안고 집에 들어왔고, 그녀의 어머니 이정아는 곧 정성호와 재혼했다.
어머니는 정아름을 더 사랑했고 정라엘은 버림받았다.
정아름이 시험에서 99점을 받으면, 정라엘은 100점을 받아도 혼나기 일쑤였다.
“왜 동생보다 더 높게 받아서 동생 기죽이고 그래? 네가 양보하면 안 돼?”
정아름이 아파서 삭발이라도 하면, 이정아는 정라엘 머리카락도 밀어버렸다.
“동생만 못생겨지면 안 되지. 너도 같이 못생겨져야 동생이 안 울 거 아냐.”
매일 밤 정성호, 이정아, 정아름 세 식구가 한방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 정라엘은 정성훈이 사 준 인형을 안고 방문 밖에서 눈물만 훔쳤다.
“엄마, 라엘이 무서워요...”
그러다 어느 비 오는 날, 이정아는 그녀를 시골로 데려가 그대로 버렸다. 조그마한 정라엘은 인형을 안고 흙탕물에 넘어지면서도 소리 지르며 뒤를 쫓았다.
“엄마, 저를 버리지 마요... 라엘이 착하게 굴게요. 동생한테 다 양보할게요... 엄마 안아줘요, 무서워요...”
그렇게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우는 사이 이정아를 태운 차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라엘은 평생 정아름을 잊지 못한다.
이때 고승호가 달려왔다.
“아름... 형수님, 저 사람은... 라엘 씨예요.”
정아름은 경악했다.
“언니?”
정라엘은 정아름이 늘 자신을 무시해 왔다는 걸 안다.
정라엘은 정아름에 비해 뒤처지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항상 정아름만 더 좋은 걸 받았고 후에는 로운에서 유명한 강기준과 연애하며 꽃길을 걸었다.
애정과 찬사 속에서 자란 정아름은 자연스레 오만했고 우월했다.
고승호는 또 한 번 정라엘의 청초하고 우아한 미모에 놀란 듯 작게 중얼거렸다.
“상상도 못 했네. 라엘 씨가 이렇게 예쁠 줄이야.”
정아름은 어린 시절을 희미하게 기억만 할 뿐 한 번도 정라엘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언니라 봐줄 가치도 없다고 여겼으니까.
무엇보다 그녀 기억 속의 정라엘은 시골 출신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정아름은 정라엘에게 다가가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콧대를 치켜세웠다.
“언니 이거 날 따라 한 거지? 놀랍네.”
“...”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정라엘은 가느다란 허리를 곧게 펴고 미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클럽의 조명이 그녀의 투명하고 고운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구슬로 빚은 듯 반짝였다. 그녀는 이미 예전의 정라엘이 아니었다.
정아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기준 씨랑 이혼한다며? 근데 남자 없이 못 살아서 이븐 클럽에서 선수 불러놓고 재산 탕진하는 거야? 내가 언니라면 차라리 열심히 취직했을 거야.”
그러고는 강기준을 힐끗 보며 베푸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기준 씨, 그래도 언니가 3년간 보살펴준 건 사실이니 가사도우미라 치고 어디 일자리라도 알아봐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강기준의 시선이 다시 정라엘의 얼굴로 옮겨졌다.
고승호가 중얼거렸다.
“형수님, 요즘은 취업하려면 학력이 필요해요. 라엘 씨 학력이 어떻게 되는데요?”
정아름은 무언가 재밌는 걸 떠올렸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언니는 16살 때부터 학교 안 다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