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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정라엘이 나타났다. 백화점에서 실컷 쇼핑을 끝낸 서다은은 곧장 정라엘을 이븐 클럽으로 데려왔다. 오늘 밤 여기서 정라엘의 싱글 파티를 열어줄 생각이었다. 정라엘은 이곳에서 강기준 무리를 만날 줄 몰랐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들이 그녀를 비웃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정라엘은 자리에 앉은 고승호 무리와 서로 안면이 있었다. 그들은 강기준과 같은 부류로 어울려 놀았고, 고승호는 특히 강기준과 친한 동생이었다. 옛날 강기준과 정아름이 불꽃 같은 연애를 할 때, 이들은 모두 정아름을 좋아했다. 고승호는 정아름을 형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난 3년 동안 정라엘은 그들의 그룹에 전혀 녹아들지 못했고 그 누구도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녀에게 붙였던 꼬리표라면 굴러들어 온 돌, 미운 오리새끼, 촌뜨기 등등이었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친구들도 존중하지 않는 법이다. 서다은은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 달려갈 기세였다. “라엘아, 내가 가서 저것들 입 좀 찢어놓을까?” 정라엘은 서다은을 붙잡았다. “다은아, 됐어. 결혼도 끝났는데 시비 붙어봤자 뭔 소용이겠어.” 정라엘이 청아하고 담담한 표정을 짓자 서다은도 어렵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때 사람들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지면서 정라엘 쪽을 보며 천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서다은은 기분이 풀렸는지 웃음을 지었다. “라엘아, 가자. 싱글 파티 시작해야지.” 서다은은 정라엘을 이븐 클럽 다른 편의 고급 좌석으로 데려갔고 큰소리로 주문했다. “이븐 클럽 선수 전부 불러와요!” 다른 쪽에서는 몇몇 재벌 2세가 여전히 정라엘을 비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딘가에서 서늘하고 날 선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중간에 앉은 강기준이 게으른 듯하지만 예리하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차가운 불쾌감이 서려 있었고 경고의 기색도 느껴졌다. 재벌 2세들은 그제야 씩 웃던 얼굴이 굳혔고 황급히 입을 다물며 더는 정라엘 욕을 하지 못했다. 고승호가 강기준을 보았다. 사실 강기준은 한 번도 정라엘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정라엘이 3년간 그를 정성껏 보살핀 건 사실이니 어느 정도는 공로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주변에서 더 큰 소란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천사를 외쳐댔다. ‘천사? 어디?’ 고승호가 사람들 시선을 따라 앞쪽을 보다가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와, 진짜 천사잖아.” 곁에 있는 재벌 2세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운에 언제 저런 천사가 나타났대? 난 지금까지 본 적 없는데.” 고승호가 강기준을 재촉했다. “형, 저쪽 봐봐.” 강기준은 주변에 여자가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어떤 미인을 못 봤겠냐 싶어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마침 정라엘이 있는 자리가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강기준이 고개를 들자 정라엘이 눈에 들어왔다. 정라엘은 검은 뿔테안경을 벗고, 평소의 칙칙하고 딱딱한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작고 새하얀 얼굴은 타고난 뼈대가 도드라져 맑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부드럽게 흩어진 긴 흑발은 또 청초하고 우아했다. 그 모습이 정말 천사처럼 보였다. 강기준은 그녀를 잠깐 2초 정도 바라봤다. 고승호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 저 천사는 어때?” 다른 재벌 2세들이 깔깔거렸다. “강 대표는 별로지 않을까? 강 대표 취향은 정아름처럼 어리고 부드러운 미인이지 저런 차도녀 스타일이 아니잖아.” “야, 근데 천사님 다리 좀 봐. 정아름한테도 안 밀리는 것 같은데?” 정라엘은 샤넬 스타일의 짧은 치마를 입고 예전과 달리 과감하게 다리를 드러냈다. 그녀의 다리는 뼈대와 살이 황금비율을 이루어 자연스레 보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선을 그려냈다. 정말 정아름 못지않았다. 강기준은 2초가량 ‘천사’를 응시하고 나서 희미하게 낯익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듯한데...’ 마침 그때 선수 무리가 줄지어 들어왔다. 다들 피부도 희고 잘생긴 데다 다리도 길어 보였다. 그들이 정라엘 앞에 일렬로 서자 서다은이 웃으며 말했다. “라엘아, 여기서 여덟 명 골라.” 결혼 생활의 고통에서 해방된 걸 자축하려고 정라엘은 오늘만큼은 마음 놓고 놀기로 했다. “너, 너, 너... 그리고 너희 전부 남아.” 고승호가 하나씩 세며 중얼거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천사가 한 번에 여덟 명이나 골랐네.” 다른 재벌 2세들도 웃어댔다. “돈 낭비할 거 뭐 있어. 천사님이 한마디만 하면 우린 공짜로도 달려가는데.” 사람들은 다 같이 박장대소를 했다. 띵 그 순간 강기준의 휴대폰이 또 울리며 소비 내역 알림이 들어왔다. 강기준은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정라엘이 또 뭘 샀지?’ [0975 승인 60,000,000원(일시불) 이븐 클럽] 강기준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이븐 클럽이라는 문구를 두 번이나 읽은 후 맞은편의 천사를 바라봤다. 한 번에 선수 8명을 쓸어 간 천사... 그게 정라엘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강기준은 침묵에 잠겼다. 선수들은 정라엘 옆을 에워싸고 술잔에 술을 따르며 부추겼다. “누나, 우리 가위바위보 술 게임 하자.” 서다은도 즐겁게 웃었다. “좋아, 놀자 놀자!” 첫 라운드에서 정라엘이 졌고, 선수 하나가 술잔을 들고 그녀를 먹어줬다. “누나, 한 잔해.” 정라엘이 그걸 마시자 다른 선수들이 질투하듯 나섰다. “누나, 왜 쟤 술만 받아? 우리 것도 마셔줘!” 갑작스러운 달콤한 부담에 정라엘은 감당하기 벅찬 듯 보였다. 정말 일일이 다 챙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강기준의 가늘고 긴 눈매가 좁혀졌다. 오관은 순식간에 굳으며 음울해졌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고승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 어디 가?” 정라엘이 술을 마시는 그때, 뼈마디가 도드라진 한 손이 쑥 뻗어와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꼭 병아리를 움켜쥐듯 소파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정라엘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강기준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몸부림치며 팔을 빼려 했다. “강기준, 이거 놔!” 하지만 강기준은 냉혹한 표정으로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 서다은이 벌떡 일어섰다. “야, 강기준! 뭐 하는 거야! 당장 라엘이 놓지 못해!” 곁에 따라온 고승호와 재벌 2세들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자기가 환청을 듣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라엘...? 천사가 정라엘이라고?” “저 천사가 우리가 알던 오리새끼 정라엘 맞아?” “원래 저렇게 예뻤나?” 강기준에게 끌려가는 절세미인에 고승호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젠장, 형이랑 이혼하고 나니 그 정라엘이 천사가 됐다고?” 강기준은 정라엘을 움켜잡은 채 강한 완력으로 그녀 손목을 가둬 버렸다. 마치 쇠사슬 같은 힘이 느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는 걸음이 빨랐고 정라엘은 비틀거리며 질질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강기준, 이거 놔!” 그러자 강기준은 돌연 손을 홱 뻗어 정라엘의 가녀린 등을 차가운 벽에 부딪치게 했다. 곧 시야가 어두워지며 강기준의 큰 몸이 다가와 그녀를 벽에 가두었다. 강기준 눈동자에는 위험한 불꽃이 이글거렸다. “정라엘, 너 이렇게 막 놀아나는 건... 날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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