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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정라엘 역시 강기준을 바라보며 가볍지만 단호한 어조로 한 번 더 말했다. “우리 이혼해, 기준 씨. 이 생일 선물 마음에 들어?” 강기준은 눈 한번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내가 너랑 생일 안 보냈다고 이혼하자는 거야?” “정아름... 귀국했다며?” 정아름 이야기가 나오자 강기준은 입술 선을 비죽이듯 말아 올리며 낮게 코웃음 쳤다. 그는 긴 다리를 뻗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정아름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어린 나이에 상업계 전설로 불리게 된 강기준은 권력과 신분, 돈과 지위를 덧씌운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정라엘은 무의식중에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등 뒤에 벽이 닿더니 싸늘한 감촉이 전해졌다. 이때 시야가 어둑해졌다. 강기준이 벌써 몸을 기울여 다가왔고 한 손을 그녀 옆쪽 벽에 짚어 자기 가슴과 벽 사이에 가둬버렸다. 강기준은 눈꺼풀을 아래로 드리운 채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입가에 비웃음을 그렸다. “로운에 내 약혼녀가 아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네가 온갖 수를 써서 나랑 결혼할 때 그걸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그때는 신경 안 쓰더니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정라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맞다, 그가 결혼하려던 사람은 정아름이고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순서가 돌아올 일도 없었다. 그녀는 그가 깨어났던 날을 영영 잊지 못한다.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보며 숨기지도 않고 드러냈던 실망과 냉정함을 말이다. 그 후로 그는 계속 다른 방에서 잤고 단 한 번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사랑하는 건 정아름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라엘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강기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모습이 어린 시절의 앳된 소년과 겹치는 듯했다. ‘강기준, 넌 정말 나를 기억 못 해?’ 결국 그녀 혼자만 원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그만두자.’ 지난 3년은 그녀가 가진 애정을 다해 스스로 헌신했던 시간이다. 정라엘은 마음속 쓰라림과 아픔을 눌러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부부가 할 일 해본 적도 없는 거... 이제 끝내자.” 강기준은 검고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묵직하고 매력적인 음색으로 말을 뱉었다. “부부가 할 일?”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작고 갸름한 턱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그녀의 빨간 입술 위에 내려놓아 모호하게 눌렀다. “결국 그거 때문에 이혼하자는 거야? 이제 원한다는 건가?” 정라엘의 고운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며 잘 익은 베리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엄지는 그녀의 입술을 악의적으로 문지르며 조여 왔다. 이렇게 잘생기고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도 은근히 성숙하고 가벼운 면이 있구나 싶어 당혹스러웠다. 손가락으로 여자의 입술을 희롱하다니 말이다. 강기준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정라엘을 본 게 처음이었다. 그녀는 늘 흑백 계열의 옷만 입고 커다란 뿔테안경을 써서 나이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들여다보니, 그녀의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큰 안경 아래 숨은 이목구비는 말로 다 못 할 만큼 청초하고 단정했다. 거기에 검고 흰 윤곽이 분명한 어린 사슴 같은 눈동자는 절묘하게 아름다웠고 입술도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붉은색이 사라졌다가 금세 말랑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왠지 입맞춤하고 싶게 만들었다. 강기준은 눈빛을 살짝 어둡게 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네. 남자를 그렇게 원하는 건가?’ 짝! 갑작스럽게 정라엘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강기준은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정도로 세게 맞았다. 정라엘은 분노에 손끝이 떨렸다. 역시 사랑이 값싸게 쳐지면 진심이 짓밟히고 마는 건가 싶었다. 그는 그녀를 모욕하고 있었다. 정라엘은 치욕감에 치를 떨며 말했다. “당신이 정아름을 잊지 못한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이제 둘이 마음대로 해! 내 자리 정아름한테 돌려주면 되잖아!” 강기준의 얼굴은 삽시간에 냉랭하게 굳었다. 고귀한 그가 이렇게 뺨을 맞은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라엘, 결혼도 멋대로 하더니 이제 이혼도 멋대로 하려고? 넌 날 뭐로 생각하는 거지?” 정라엘은 작게 비웃었다. “장난감이겠지.” “... 뭐라고?” 강기준의 눈빛이 갈라질 듯 일그러졌다. 정라엘은 쓰라린 가슴을 누르며 거짓으로 말했다. “난 정아름 손에서 당신을 빼앗아 온 거야. 근데 이제 지겨워졌어. 버리고 싶어졌다고.” 강기준의 눈동자가 이윽고 음산해졌다. 금방이라도 먹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처럼 어두워졌다. “좋아. 잘하는 짓이네. 이혼하자. 근데 다시는 날 붙잡고 울며불며 매달릴 생각하지 마!” 그는 발길을 돌려 2층 서재로 올라가 문을 쾅 닫았다.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정라엘은 마치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벽을 타고 서서히 주저앉았다. 그녀는 카펫 위에 웅크리고 자기 어깨를 감쌌다. ‘강기준, 난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다음 날 아침. 가사도우미 오영자는 서재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강기준은 의자에 앉아 서류를 훑고 있었다. 원래도 일에 파묻히기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예민하고 삭막해 보였다. “강 대표님.” 강기준은 눈길도 들지 않았고 주위 온도는 바닥을 칠 정도로 냉랭했다. 오영자는 조심스레 커피를 그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거 사모님께서 끓여주신 커피예요.” 강기준은 펜을 쥔 손을 잠깐 멈추고 아까까지만 해도 싸늘했던 표정에 미세한 변화를 보였다. ‘화해하려고 그러나?’ 솔직히 정라엘은 좋은 아내였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도 직접 만들어주고, 그의 옷가지도 정성껏 손빨래하고, 자잘한 생활도 세심하게 챙겼다. 강기준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끓여준, 그리고 그가 즐겨 마시던 그 맛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어젯밤 그녀가 자신을 때린 일은 쉽게 넘어가지 못할 일이었다. 단순히 커피 한 잔으로 달랠 수 있는 기분도 아니었다. 강기준은 물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했나요?” 오영자는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강기준을 봤다. “... 그게, 사모님께서 집을 나가셨어요.” 강기준은 멍해졌다가 천천히 오영자를 올려다봤다. 오영자는 뭔가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거... 사모님께서 캐리어를 끌고 떠나시면서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종이를 받아 펼치자 이혼 합의서 여섯 글자가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말문이 막혔다. 분명 화해하려고 커피를 가져다준 줄 알았는데 말이다. 오영자가 말을 덧붙였다. “사모님꼐서 이 커피 다 마시고 곧장 사인하라고 하셨어요. 이 이혼 서류에...” 강기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커피잔을 노려봤다. “버려요. 다 버리라고요.” ‘조금 전까진 꽤 맛있게 드신 것 같던데... 왜 또 버리라는 거지?’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둘러 커피잔을 치웠다. 강기준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이혼 합의서를 재빨리 훑었다. 그녀는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 빈손으로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비웃음을 지었다. ‘진짜 큰 결심했네. 시골 출신이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먹고살겠다는 거지?’ 3년 전에 온갖 꼼수를 부려 그에게 시집온 것도 결국 돈이 목적이었지 않나 싶었다. 그러다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이혼 사유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건 정라엘이 손으로 직접 적어놓은 문구였다. [남자 측 신체적 결함으로 부부 생활 불가능.] “...” 강기준은 순식간에 얼굴이 새까매졌다. ‘빌어먹을...’ 강기준은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고 정라엘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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