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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라엘은 남편 강기준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와 바람난 상대는 무려 여대생이었다. 오늘은 강기준의 생일이라서 정라엘은 아침 일찍부터 음식을 한가득 준비했다.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강기준이 집에 두고 간 휴대폰이 울렸고 정라엘은 여대생이 보낸 문자를 보게 되었다. [케이크 들고 오다가 부딪혔어. 너무 아파...ㅠㅠ] 문자에는 셀카 사진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는데, 얼굴은 나오지 않고 다리만 찍혀 있었다. 사진 속 소녀는 흰 스타킹과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고,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치마가 위로 밀려 올라가 매끈하고 아름다운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새하얀 무릎이 부딪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앳된 여대생의 몸매와 애교 섞인 문자는 묘하게 금지된 유혹을 풍기는 듯했다. 사업에 성공한 사장들이 애인을 고를 때 이런 타입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로운시 곳곳에 돌고 있었다. 정라엘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휴대폰을 꽉 쥐었다. ‘정말 사실이구나...’ 그녀는 충격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띵. 여대생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 [기준 씨, 우리 휴스턴 호텔에서 만나. 오늘 생일이잖아. 내가 축하해줄게.] 강기준은 바깥에서 여대생과 생일 파티를 즐기려는 모양이었다. 정라엘은 가방을 들고 바로 휴스턴 호텔로 향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여대생이 누군지 반드시 알고 싶었다. 정라엘이 휴스턴 호텔에 도착해 막 들어가려던 순간, 뜻밖에도 아버지 정성호와 어머니 이정아를 마주쳤다. “아빠, 엄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정성호와 이정아는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라엘아, 네 동생이 귀국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아름이가요?” 정라엘은 통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봤고 곧장 몸을 굳혔다. 안에는 정아름이 있었는데,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치마를 입고 있었다. 사진 속 모습과 똑같았다. 결국 그 여대생은 그녀의 동생 정아름이었다. 정아름은 태어날 때부터 미인으로 유명했고, 로운시의 붉은 장미라 불릴 정도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더군다나 로운시에서 가장 예쁘다는 다리를 갖고 있어서 많은남자가 그녀의 다리에 무릎 꿇었다. 지금은 그 다리로 강기준까지 유혹해 버린 셈이었다. 정라엘은 허탈한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결국 내가 제일 늦게 알았네.” 정성호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엘아, 기준이는 널 좋아하지 않아.” 이정아도 거들었다. “그래, 라엘아. 로운시에 기준이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차라리 네 동생한테 양보하는 게 나아.” 정라엘은 손을 꽉 쥐었다. “저도 아빠 엄마 딸이에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뒤돌아서 걸어 나갔다. 그때 뒤에서 이정아 목소리가 들렸다. “라엘아, 하나만 묻자. 기준이가 너 건드린 적은 있어?” 정라엘은 걸음을 멈췄다. 정성호는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우리는 너한테 빚진 거 없어. 기준이랑 어울리는 사람은 원래도 아름이었어. 기준이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탓에 네가 대신 결혼한 거잖아.” 이정아는 정라엘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헐뜯듯 말했다. “지난 3년 네가 남편만 돌보는 주부 노릇이나 할 때 아름이는 벌써 수석 발레리나가 됐어. 백조랑 못난 오리인 주제에 네가 뭐로 아름이를 이기겠니? 어서 기준이를 아름이한테 돌려줘!” 그 말들이 칼날이 되어 정라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눈가가 빨개진 채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정라엘은 캄캄한 밤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사도우미 오영자에게도 휴가를 줬기에 텅 빈 집 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고요하고 쓸쓸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불도 켜지 않은 식탁 의자에 홀로 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끈했던 음식은 다 식었고 직접 만든 케이크도 그대로였다. 케이크 위에는 ‘기준 씨, 생일 축하해’라고 적혀 있었다. 너무나 눈이 쓰라린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이 모든 게 자신과 똑같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강기준과 정아름은 이미 로운시에서 유명한 커플이었고, 누구나 붉은 장미 정아름이 강기준의 첫사랑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3년 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강기준이 식물인간이 되자, 정아름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 정성호와 이정아가 시골에 있던 정라엘을 데려와 식물인간인 강기준과 대신 결혼시켰다. 그러나 정라엘은 그가 자신이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강기준’임을 알고 있었고 기꺼이 결혼을 수락했다. 결혼 후 강기준이 3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을 때, 정라엘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보살폈다. 외출도 모임도 전부 끊고, 그를 살려내겠다는 마음 하나로 매달렸다. 결국 그녀의 노력이 통했고 강기준은 깨어났다. 정라엘은 라이터를 꺼내 초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이 거울에 비치자 단정한 흑백 원피스를 입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가정주부인 그녀가 비쳤다. ‘결국 미운 오리 새끼에 불과했네....’ 반면 3년간 수석 발레리나로 빛났던 정아름은 여전히 생기 넘치는 백조 같았다. 마침내 깨어난 강기준은 백조 곁으로 돌아갔고 오리인 그녀는 가볍게 버렸다. 정라엘은 허탈한 마음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3년 내내 나 혼자 마음을 쓴 거였어. 기준 씨는 날 사랑하지 않아. 근데 난 기준 씨를 사랑했지. 먼저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했는데, 오늘은 내 패배네...’ 그녀는 촛불을 후하고 불어 껐다. 그러자 온 집 안이 다시 깊은 어둠에 잠겼다. 바로 그때 창밖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환하게 들어왔다. 강기준의 롤스로이스 팬텀은 잔디밭 위에 멈춰 섰다. 정라엘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은 아예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돌아온 것이다. 곧 현관문이 열리고 차가운 밤공기를 두른 고급스럽고 멋진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기준이 집에 돌아왔다. 강기준의 가족은 로운시에서 재벌가로 손꼽히고, 그는 한스 그룹의 후계자로 자라면서 16살에 이미 하스턴 대학원 복수 전공 석사 학위를 받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나중에는 첫 창업에 성공을 거둔 뒤 귀국해 한스 그룹을 이어받아 로운시 최고 재벌로 자리 잡았다. 강기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곧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불 안 켰어?” 그는 스위치를 눌러 환하게 불을 밝혔다. 눈 부신 빛이 번쩍하자 정라엘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그를 바라봤다. 맞춤 제작한 검은 수트를 입은 그는 타고난 차가운 기품과 우월한 신체 비율로 밤마다 수많은 명문가 딸의 꿈에 등장할 것 같은 존재였다. 정라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당신 생일이잖아.” 강기준은 표정 변화 없이 식탁을 흘끗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이런 거에 시간 쓰지 마. 난 신경 안 써.” 정라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원래 이런 거 안 챙기는 거야, 아니면 나랑 챙기기 싫은 거야?” 강기준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렇게 말하고 곧장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어떻게 해도 그 차가운 마음을 데울 수가 없었다. 정라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무정한 등 뒤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오늘 당신 생일이라 선물 준비했는데.” 강기준은 걸음을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필요 없어.” 정라엘은 작게 미소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기준 씨... 우리 이혼하자.” 이미 계단에 한 발 올라섰던 강기준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정라엘을 꿰뚫듯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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