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강기준은 ‘정아름’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이성을 되찾았다.
지금 그는 심란했다.
옷은 반쯤 젖어 있었고 몸에는 여자에게 키스를 당한 흔적이 가득했다.
조금 전 욕망이 피어올랐기 때문에 숨조차 아직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상이 하필 정라엘이라니!
그는 정라엘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여 이 모든 이유를 단순히 자신도 남자이고 매혹적인 여인의 유혹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강기준은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정아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미안함이 커질수록 애틋한 감정이 더해졌다.
그래서 목소리도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아름아.”
전화 건너편에서는 강렬한 음악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정아름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준 씨, 나 지금 클럽이야.”
“술 마시지 마. 비서한테 우유라도 시켜 달라고 해.”
“알았어. 내 비서는 기준 씨 말 잘 듣는다니까? 기준 씨도 와서 같이 놀자. 기다릴게.”
강기준은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작은 손이 다가와 그의 셔츠 소매를 붙잡았다.
강기준은 고개를 돌렸다.
정라엘은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는데 얇은 슬립 드레스가 몸에 들러붙어 매끈한 실루엣을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강기준의 소매를 힘껏 잡고 있었다.
강기준은 팔을 움직여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소매를 빼내려 했다.
그러나 정라엘은 집요하게 잡고 있었고 더욱 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정라엘이 갑자기 몸을 기울여 그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가지 마. 제발.”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정라엘은 여전히 혼자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것이 무서웠다.
강기준은 그런 그녀에게 묶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정아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기준 씨, 내 말 듣고 있어? 빨리 와.”
그 순간, 정라엘은 발끝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야...”
이 호칭은 오로지 어린 시절 그 소녀만이 강기준을 부르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정아름이 아니었던가?
갑자기 강기준의 표정이 굳었다.
“아름아, 급한 일이 생겼어. 못 갈 것 같아.”
전화를 끊은 그는 정라엘을 벽에 밀치고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누가 너한테 날 오빠야라고 부르라고 했어? 정라엘, 너 도대체 누구야?”
곧 정라엘은 강기준의 목을 감싸 안으며 단번에 그의 입술을 덮쳤다.
그녀의 부드럽고 붉은 입술이 느닷없이 닿았고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풋풋하지만 은근히 자극적인 유혹이었다.
강기준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그런 정라엘을 응시했고 그녀 또한 촉촉하고 맑은 눈으로 강기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강기준은 정라엘의 눈이 어린 시절 그 소녀의 것과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라엘은 잠시 키스를 이어가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강기준의 모습에 이내 물러났다.
‘그만두자.’
뒤이어 그녀는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강기준이 팔로 정라엘의 가냘픈 몸을 단단히 감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남자의 기운이 주위를 감싸더니 강기준은 고개를 숙여 정라엘의 입술을 덮쳤다.
...
클럽.
정아름은 자신의 비서와 함께 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비서가 물었다.
“오늘 강 대표님 안 오시는 건가요?”
정아름은 의심이 들었다.
‘아까 전화했을 때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어. 마치 누가 곁에 있는 것 같았는데...’
하여 그녀는 곧바로 고승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호 씨, 지금 기준 씨랑 같이 있어요?”
그러자 고승호가 대답했다.
“아니요. 근데 형이 나한테 전화 와서 어떤 여자가 약에 취했다던데요.”
그러다 고승호는 뭔가 떠올린 듯 말했다.
“혹시 정라엘 씨 아닐까요?”
강기준의 사생활은 늘 깔끔했다.
과거에는 오직 정아름뿐이었지만 이제는 정라엘이 추가되었다.
너무나 추측하기 쉬운 일이었다.
순간 정아름은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지만 곧 입꼬리를 씩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비서에게 말했다.
“약 하나 가져다줘.”
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약이요?”
정아름은 붉게 물든 입술을 살짝 벌리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세 글자를 내뱉었다.
“흥분제.”
...
저택의 욕실.
정라엘은 강렬한 키스에 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강기준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어느새 정라엘의 두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순간 벨소리가 울리며 강기준의 핸드폰에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화면 속 정아름은 한 클럽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술잔과 함께 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기준 씨, 라엘 언니 지금 기준 씨 옆에 있지? 언니가 약에 취한 거잖아.”
강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아름은 작은 봉지를 꺼내더니 그 안에 든 가루를 술잔에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강기준이 보는 앞에서 술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이 모습에 강기준은 눈썹을 찌푸렸다.
“정아름, 뭐 먹은 거야?”
그러자 정아름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흥분제.”
정라엘은 가슴이 떨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약을 타 먹인 사람이 정아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강기준의 표정은 이미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정아름!”
그때 한 키 큰 남자가 정아름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술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정아름은 영상통화 속의 강기준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사람 제 남자친구예요. 하지만 만약 이 사람이 30분 안에 오지 않는다면 오늘 밤 나는 그쪽 거예요.”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렸고 강기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정아름, 지금 무슨 짓 하고 있는 거야?”
정아름은 당당하게 미소지었다.
“나랑 라엘 언니 중 한 사람만 선택해. 기준 씨한테는 한 여자만 있어야 하니까.”
이렇게 말을 끝내고 정아름은 영상통화를 끊어버렸다.
강기준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핸드폰을 쥔 손에는 힘을 하도 주어 핏줄이 도드라졌다.
‘기준 씨한테는 한 여자만 있어야 하니까.’
‘엄마한테는 딸 한 명만 있어야 해요.’
정라엘의 귀에 이 비슷한 말들이 마치 저주처럼 울려 퍼졌다.
그녀는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순간, 온몸을 감싸던 따뜻함이 사라졌다.
강기준은 그녀를 놓아준 채 방을 나갔다.
정라엘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빠르게 젖은 옷을 갈아입고 깔끔한 셔츠와 바지를 차려입고 돌아왔다.
다시 정라엘의 앞에 선 강기준은 어둡고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해?”
“... 뭐라고?”
정라엘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강기준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남자 한 명 찾아줄게. 아니면... 두 명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