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그녀의 눈앞에 병원이 있었다.
정지헌은 덤덤히 말했다.
“네가 귀신처럼 안색이 창백한 걸 우리 할머니가 보신다면 또 날 탓할 테니까.”
김소정이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자 정지헌은 짜증 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얼른 차에서 내려서 검사받아. 갑자기 죽어서 나한테 피해주지 말고.”
김소정은 속으로 약간 안도했다.
그녀는 정지헌이 뭔가를 눈치채고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검사받으러 온 줄 알았다.
김소정은 정지헌을 힐끗 보더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정지헌이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의 바지를 바라보고 있는 줄 몰랐다.
김소정은 이틀 동안 열이 났고 배도 아팠다. 그리고 조금 전 화장실을 갔을 때는 바지에 피가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김소정은 아이가 이미 죽었을 거로 생각했다.
지워버리려고 마음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아이가 죽은 것 같자 괴로웠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다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다행이네요. 소량의 출혈은 괜찮아요. 데이터를 보니 괜찮네요. 아기가 굉장히 강한가 봐요.”
김소정은 기쁜 얼굴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제 아기, 괜찮은 건가요?”
“네. 환자분 배 속에 무사히 있어요.”
의사는 김소정의 붉어진 눈시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기가 엄마 옆에 꼭 붙어있고 싶어서 이렇게 강한가 봐요. 조건이 된다면 낳도록 해요.”
의사의 말이 김소정의 마음을 약해지게 했다.
게다가 잃었다고 생각한 아이가 무사하다고 하니 기뻤다.
그래서 김소정은 아기를 지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김소정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병원에서 나왔을 때 김소정은 정지헌의 차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걸 발견했다.
설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정지헌은 좌석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마디마디 분명한 그의 손이 차창 위로 놓였는데 석양을 받으니 예뻐 보였다.
정지헌은 양지민에게 운전하라고 했다.
차에 시동이 걸렸다.
김소정은 입술을 깨물며 저도 모르게 자신의 평평한 배를 만졌다.
아직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녀는 이 아이의 존재를 정지헌에게 얘기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만약 운 좋게 정지헌이 아이를 받아준다면 굳이 숨길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이 마음 편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김소정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시험해 보려고 했다.
그녀는 가방을 꽉 쥐더니 정지헌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거 맞죠?”
정지헌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조롱 조로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의 얼굴을 보니 이혼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김소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찍 이혼하고 싶다면 아이를 낳아야 한는데...”
정지헌은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김소정을 바라보았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난 너 같은 여자에게 내 아이를 가질 기회를 주지 않을 거니까.”
김소정은 용기를 내서 물었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정말로 지헌 씨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요?”
정지헌은 갑자기 음산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김소정은 온몸이 서늘해졌다.
정지헌이 말했다.
“네게 그럴 자격이 있을 것 같아? 네가 정말로 내 아이를 가진다고 해도 난 그 아이를 지울 거야. 네가 낳은 아이라니, 누가 봐도 내게는 치욕이잖아?”
정지헌의 눈빛은 한없이 매정했다.
김소정은 순간 가슴이 쿡쿡 쑤셔서 자조하듯 웃었다.
너무 기뻤던 탓에 이성을 잃고 요행 심리로 무자비하고 매정한 정지헌을 시험해 보려고 하다니.
정지헌은 담배를 입에 물더니 서늘한 시선으로 김소정을 바라보았다.
“난 똑똑히 말했어. 선 넘지 마.”
“... 네.”
김소정은 작게 대답했다.
배가 눈에 띄게 불러오기 전에 정씨 일가를 떠나야 할 듯싶었다.
인터넷에서는 임신 3, 4개월쯤 되어도 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5개월쯤 되면 널찍한 옷을 입었을 때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도망칠 계획을 꾸밀 시간은 3개월 정도 남아있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김소정은 아버지의 원통함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공사장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녀는 강다은에게 부탁하여 강다은 아버지의 인맥을 빌려 공사장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강다은은 빠르게 움직여서 바로 다음 날 인맥을 찾았다.
“소정아, 그 사람들 2층 룸에 있어. 비록 새로 온 사장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들 공사장 담당자랑 아는 사이래. 아마 도움이 될 거야. 미안해, 소정아. 우리 아빠가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은 이 정도밖에 안 돼.”
김소정은 강다은을 안았다.
“고마워, 다은아.”
“얘 좀 봐. 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는 말을 해?”
강다은은 김소정을 향해 웃어 보였다.
“참, 지난번 일로 내가 아빠 혼냈어. 이번에는 모두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평소에도 점잖아 보였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지난번 같은 일이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알겠지?”
“그래.”
김소정은 감격한 얼굴로 강다은을 안았다.
강다은의 아버지는 레스토랑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아마도 그녀의 안전을 고려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김소정은 2층에 도착해서 룸을 찾았다.
아주 열심히 찾느라 그녀는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고서준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고서준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정지헌은 집으로 돌아갔다.
김소정이 없으니 어두컴컴한 집안은 평소보다 더욱 썰렁해 보였다.
정지헌은 저도 모르게 자조했다.
예전에 그는 단 한 번도 집이 썰렁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정지헌이 소파에 앉자마자 고서준에게서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