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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고백

나는 치솟는 감정들을 누르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빗속의 성영준은 키가 아주 컸다. 척 보기엔 185가 넘어 보였다. 핏이 딱 떨어지는 검은 정장 차림의 성영준은 들고 있는 검은 우선은 전부 내 쪽으로 기울인 탓에 폭우에 온몸이 젖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동자는 빗속에서 더욱더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 생의 그는 나에게 있어서는 냉랭하고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른이었다. 늘 감정은 감추고 있는 탓에 눈치라고는 없는 내가 나만을 다르게 대하는 그를 알아채기는 힘들었다. 회귀한 이번 생에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 냉랭한 가면 아래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얼마나 굳건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입을 열기도 전부터 나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걜 만나러 온 게 아니에요. 오빠 보러 온 거예요.” 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성지태처럼 삼촌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평소 같은 존칭을 쓰진 않았다. 나는 성영준을 떠보고 있었다. 성영준은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고 늘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해 나는 조금씩 다가가야 했다. 역시나, 그는 나의 호칭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난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일전에, 성지태가 나 하나만 사랑하게 하기 위해 성지태 주변 사람들을 나의 편으로 돌리려고 아부를 하며 갖은 심혈을 기울였었다. 그 사람 중에는 성영준도 있었다. 성지태와 임유민의 일을 성영준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그를 찾아온 것을 도움 요청으로 오해를 한 것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해명했다. “영준 오빠, 오해예요. 전 그냥 오빠 만나러 온 거예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성영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을 자르더니 이내 기사에게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지시했다. 그가 등을 돌려 떠나려고 하자 나는 다급함에 수를 쓰며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연기였다. 이 방법이 아니라면 그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기절한 척해봤자 최악은 바닥에 널브러지는 것뿐이었다. 기껏 해봤자 조금까지는 게 다였다. 그러니 나는 성영준이 나를 걱정할 거라는 것에 걸고 진심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조심해!” 몇 초 뒤, 나의 도박은 승리했다. 성영준은 끝내 내가 넘어지는 것을 가만두지 못하고 단단한 팔로 나의 허리를 안았다. 피가 퍼붓듯 쏟아지는 밤에 그는 나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진 거리에 온통 그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향 좋은 담배 냄새에는 옅은 알코올 냄새와 그 특유의 우드 향이 느껴졌다. 나는 자연스레 성영준의 품에 기댔다. 그가 밀어낼까 봐 얼른 목에 팔을 감았다. 마치 서러운 고양이마냥 달달 떨며 그의 품에 안겨 붉어진 눈으로 울먹였다. “오빠, 저 추워요. 아까 비를 맞고 감기에 걸렸나… 에취.” 이것 역시 연기였다. 연기가 진짜 같은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나는 그에게 달라붙을 생각이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남자의 구애는 선을 넘듯 힘들지만 여자의 구애는 비단 한 필 차이밖에 안 된다는 말처럼 내가 충분히 노력만 한다면 이 긴 방학 안에 성영준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소지안!” 성영준은 나의 연기를 알아챈 듯 목소리에는 경고가 가득했다. 몰라, 이미 체면도 내다 버린 마당에 나는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운전기사가 어떻게 보든, 성영준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어차피 지금의 나는 고작 19살에 불과했다. 딱 천진하고 생떼를 부릴 나이였다. “오빠를 기다리느라고 다리도 저리고 물집도 잡히고 이렇게 젖기까지 했는데 왜 화를 내요….” 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성영준은 쪽팔린 건지 아니면 마음이 약해진 건지 끝내는 나를 안고 차에 탔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처음에는 우는 척을 했을 뿐이지만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크흠, 그것도 꽤 오래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이튿날 오전이었다. 나는 성영준의 별장에서 깨어났다. 비록 손님방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시작부터 조짐이 좋았다. 헤헤, 이제 고백할 타이밍을 찾아야지. “영준 오빠, 있어요?” 나는 잔뜩 기대를 품고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성영준은 보이지 않았다. 되레 거실 소파에서 성영준의 비서, 린다를 발견했다. 딱 붙는 정장 차림의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분노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쪽팔린 줄도 모르는 어린애 주제에, 대표님이 집에 데리고 왔다고 특별 취급한다고 생각하지 마. 똑똑히 들어, 대표님은 너 같이 피도 안 마른 애는 안 좋아하니까 눈치껏 꺼져.” 나는 린다를 알고 있었다. 나는 린다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경시 고위직의 딸이었다. 성영준을 좋아해서 성영준의 마음을 얻겠다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영준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고 사랑과 원망이 뒤섞인 애증으로 인해 그녀는 끝내 성한 그룹에 연달아 복수를 해댔다. 나는 성영준의 번호를 알고 있어 린다는 무시한 채 곧바로 성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준 오빠….” 그래, 나는 이번에도 또 울었다. 이번에도 연기였다. 나는 뻔뻔하게 성영준을 향해 말했다. “오빠 비서가 나 욕해요. 때리기까지 했어요. 살려줘요, 영준 오빠.” 성영준은 어디에 있는 건지, 전화 너머가 조금 시끄러웠다. “전화 넘겨.”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영준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화를 건네받은 린다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용서야, 해줄 수도 있지. 대신에 영준 오빠 스케줄 알려줘.” 그랬다, 이게 바로 내 목적이었다. 나는 얼른 성여준에게 난 이제 진짜로 성지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린다는 자신이 먼저 잘못한 데다, 내가 또 고자질을 할까 봐 내키지 않는 얼굴로 성영준의 스케줄을 내게 보여줬다. 성영준은 출장을 간 것이었다. 이제 사흘은 더 있어야 귀국했다. 나는 린다를 쫓아낸 뒤 별장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청소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성영준의 집이니 나는 기꺼이 바삐 돌아쳤다. 사흘은 빠르게 지났다. 성영준이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회사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휴대폰을 토독거리며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영준 오빠, 나 배고파요.] 그와 함께 별장 주방을 찍은 사진을 첨부했다. 성영준은 그제야 내가 여태 떠나지 않은 것을 알고는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성영준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작은 새처럼 그의 품 안에 날아들었다. 더는 부끄러워할 시간이 없었다. 성지태는 매일같이 나에게 얼른 돌아와 파혼하라고 메시지를 보내며, 도망 쳐 봤자 소용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영준 오빠, 나 훠궈 먹고 싶어요.” 그의 목에 팔을 감은 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아주 차가웠다. 넥타이를 잡아 빼며 그는 차갑게 일갈했다. “놔.” 아우라가 너무 강했던 탓에 더 까불지는 못하고 얌전히 손을 푼 나는 조용히 소파로 가서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단하게 씻고 나온 성영준은 다른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내가 고심해서 준비한 별장 안의 꽃들을 본 듯 다시 내 앞으로 온 성영준의 잘생긴 얼굴은 조금 온화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훠궈 안 먹을 거야?” 성영준의 물음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을래요, 먹을래요. 영준 오빠, 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나는 다시 활기를 되찾고는 포기하지 않고 성영준의 팔짱을 끼고는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훠궈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성지태와 임유민도 보였다. 나는 등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성지태가 짜증을 내며 달려왔다. “소지안, 이게 네 목적이야? 삼촌이 나서면 내가 파혼 안 할 줄 알아? 똑똑히 들어, 그럴 가능성은 없어!” 사람들 앞에서 성지태는 나를 매몰차게 모욕했다. “성지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나는 손을 들어 그대로 그의 뺨을 내려쳤다. 성지태는 내 행동에 얼어붙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마치 어떻게 자신을 때릴 수 있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에 나는 냉소를 흘렸다. “거울 찾아서 제대로 봐봐. 왜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 오르지도 못할 나무 탐낸다고? 하, 성지태. 똑똑히 들어. 이 세상 남자가 다 죽고 너 하나만 남는다고 해도 난 널 안 좋아할 거야!” 등을 돌린 나는 발꿈치를 들어 고민도 없이 성영준을 향해 입을 맞춘 뒤 큰 소리로 고백했다. “영준 오빠, 내가 계속 좋아하던 사람은 오빠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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