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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장

이변섭이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응." 느릿느릿 대답하는 그의 말투에는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수지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을 건넸다. "아이 지우지 않을 거고, 엄마한테도 약을 드시게 하고 싶어요." "다 갖고 싶다? 네가 뭔데?" 그녀는 어젯밤 이변섭의 취담이 생각나서...... 그가 아직도 기억할지 궁금했다. 생각하다가 강수지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어젯밤에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잖아요. 내가 말만 하면,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다 들어주겠다면서. 변섭 씨, 나 지금 답을 찾았거든요." 그는 살짝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사실 나, 당신 곁에 남아 당신이 주는 고통과 치욕 받아줄 수 있어요.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이요. 다만 내 가족, 친구들만은 건드리지 말아 줘요." "그리고 이 아이도 낳고 싶어요. 내 뱃속에 있는 이 아이, 이 세상 빛을 볼 권리를 잃게 하고는 싶지 않다고요." "내가 키우지 않아도 돼요. 낳아서 곧장 보살펴줄 수 있는 다른 사람한테 보내져도 괜찮아요. 만약....."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강수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당신 아이를 낳으라고 하면 그것도 약속할게요." 그녀는 자신의 평생 자유와 권리로 주변 사람들의 평안과 기쁨을 바꾸려고 했다. 그녀만을 희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생에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변섭을 주인으로 섬기지 뭐. 말을 마친 강수지는 약간 초조하게 손을 꼭 움켜쥐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어젯밤? 이변섭이 몸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난 다 잊었는데." 그 말은 강수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술에 취해서 한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강수지, 넌 너무 순진해." 묵직한 펀치처럼 그녀의 마음을 강타했다. 그래, 그녀가 순진했고, 혼자서 착각했던 게 맞았다. 이변섭의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 "자신이 신분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나 봐. 네가 원한다고? 내가 줘? 헛, 웃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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