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역시 강수지는 천생 여우가 분명했다!
“일어나!”
이변섭은 거친 손길로 그녀의 옷을 여며주며 성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그의 목소리에 강수지는 두 눈을 번쩍 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 오셨어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좌우를 둘러보며 억울한 표정으로 해명했다.
“저 일부러 구석에서 쪼그리고 잤어요. 문 막지 않았다고요!”
“탕 마셨어?”
“네?”
강수지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탕 마셨냐고!”
“아니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마셔야 하나요?”
“네 생각엔?”
이변섭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지금 마실게요.”
강수지는 얌전히 운명에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왜 그렇게 장하늘이 끓인 국을 먹으라고 고집하는 건지, 그녀는 이런 그가 이해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걸 다 마시면 또 어떻게 자냐고.
부엌. 강수지는 숟가락을 들고 한 그릇 가득 담긴 해삼 갈비탕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이변섭은 그녀의 곁에 서서 그녀가 다 마시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마시려 했지만, 물씬 풍겨오는 비린내에 차마 꿀꺽꿀꺽 삼키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절반 정도 마신 그녀는 도저히 더 이상 삼켜내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됐죠?”
“네 생각엔?”
“저...”
한 글자 말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강수지는 입을 틀어막고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녀는 심하게 토했는데 방금 먹은 것은 물론이고 신물까지 모두 토해냈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변섭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이 탕을 반드시 다 마셔야만 장하늘을 속일 수 있었다.
“대표님.”
집사가 다가왔다.
“오늘 국제택배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주세요.”
택배 안에는 윌리엄이 부쳐준 약이 들어있었는데 마침 한 개의 치료 과정에 먹을 약들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탕을 바라보다가 냉소적으로 피식 웃더니 무표정하게 알약을 삼켰다.
이제 유미나를 찾았으니, 병을 다 치료하고 3개월 뒤에 이혼하면 되겠네...
모든 게 이변섭의 계획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강수지는 배를 움켜쥐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위에서 아직도 신물이 올라오며 구역질이 났다.
왜 이런 거지? 해삼탕이 아무리 비리다 해도 이렇게까지 토할 정도는 아닐 텐데...
“대표님, 사모님을 위해 가정의를 부를까요?”
집사가 제의했다.
“죽지 않으니까 오버하지 마세요!”
강수지는 감격스러운 눈동자로 집사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히 그녀 때문에 이변섭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말이다.
이날 밤, 강수지는 벽에 기대어 무릎을 껴안은 채 동이 거의 틀 무렵에야 비로소 잠에 들었다.
아래층에서는 식사 준비와 청소로 분주했다.
한편 유미나는 아침 일찍부터 제경채에 도착했다. 그녀는 흥분되어 밤새도록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날이 밝자마자 정성 들여 정교하게 메이크업을 한 뒤 이변섭을 만나러 쪼르르 달려온 것이다,
“대표님은 어딨어요?”
유미나는 거실에 들어서며 투덜거렸다.
“왜 나를 대접하는 사람이 없어?!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녀를 발견한 집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누구...”
“저 몰라요? 어휴, 답답해서 안 되겠네! 전 당신들의 미래 사모님이에요!”
“제경채엔 이미 안주인님이 계십니다.”
“누구시죠?”
집사는 침착하게 대답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유미나가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께서 직접 저와 결혼하시겠다고 했다고요!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보세요!”
“대표님께선 아직 주무십니다.”
유미나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지할 작정이었다.
“외부인은 이층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집사는 다급히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유미나의 뒤를 쫓았다.
외부인이고 뭐고 유미나는 씩씩거리며 단숨에 침실까지 걸어왔다.
발걸음 소리에 얕은 잠에서 깬 강수지는 두 눈을 뜨자마자 가까이 다가온 유미나의 얼굴을 봐야 했다.
“너야?”
유미나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으며 비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유미나?”
강수지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유미나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유미나는 병원장의 딸로 학력이 낮고 멋 부리기 좋아하는 소위 “소정운”(소정운의 팔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서 맹목적으로 소정운이 되고 싶어 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소정운은 적어도 진짜 재벌 가문의 딸이기라도 하지.
“왜 땅에서 자?”
유미나가 물었다.
“아, 알겠다. 대표님이 너더러 문을 지키라고 하신 거지? 너 정신병원에 있을 때도 괴롭힘 많이 당했었잖아.”
“이분이 바로 저희 사모님이십니다.”
뒤따라온 집사가 설명했다.
“뭐라고요?! 너, 너, 너....”
유미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강수지가 대표님한테 시집을 갔다고?!
아빠는 대표님과 잔 사람이 바로 강수지라고 했었다. 하지만 대표님이 그녀를 찾아왔다는 건 그가 그날 밤의 여인이 강수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이렇게 강수지로 사칭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지금, 강수지가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여긴 어쩐 일이야?”
강수지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이변섭 씨는 안에서 자고 있어. 꽤 모닝 성깔 있는 사람이어서 소란을 피워우면 우리한테 좋을 것 없어.”
유미나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그날 밤의 여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죽도록 물고 늘어져 절대 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게 설사 강수지더라도 그녀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이변섭 씨 찾으러 왔다가 집 지키는 개를 만날 줄이야 난들 알았겠니?”
“비켜. 나 들어가게.”
이에 강수지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박했다.
“내가 내 집을 지키는 거야. 아침 댓바람부터 주거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시끄럽게 짖어대는 들개랑은 감히 못 비기지. 백신도 안 맞은 광견 말이야.”
“너 지금 나 욕했어?”
“난 이름을 밝힌 적 없는데 네가 정 인정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고.”
말발로는 강수지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유미나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사모님이라고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 대표님과 결국 결혼할 사람은 바로 나니까!”
말하며 유미나는 강수지의 이불을 움켜쥐고 한쪽으로 던지더니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강수지가 고개를 돌려 피하자 이에 또 한 번 열받은 유미나는 다시 한번 팔을 치켜들었다. 맞힐 때까지 때리겠다는 눈빛이었다.
강수지는 빠르고 정확하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내며 다른 한 손으로 잽싸게 유미나의 뺨을 후려치려고 했다.
그녀도 결코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뒤에서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수지, 너 손대기만 해봐.”
강수지는 순간 혈이 눌린 사람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모든 동작을 딱딱하게 멈추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유미나의 뺨에서 겨우 1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었다!
이변섭은 직접 나서지 않고 그저 말 한마디만으로도 단번에 그녀를 컨트롤할 수 있었다.
“대표님!”
유미나는 그를 보자마자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애교를 부렸다.
“대표님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니면, 아니면... 저 진짜 뺨 맞았을 거예요!”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이변섭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보고 싶어서 왔죠. 너무 보고 싶어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여자가 저를 딱 붙잡고 못 들어가게 하는 거 있죠? 저를 개라고 욕하기까지 했다고요...”
참나, 잘못한 놈이 고자질하고 있네.
강수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뻔한 거짓말을 이변섭이 믿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사과하라고 하세요.”
이변섭이 말했다.
“아니면, 유미나 씨 마음대로 하세요. 분이 풀릴 때까지.”
“저 여자 말을 믿어요?”
강수지는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못 믿을 건 뭐지?”
이변섭이 되물었다.
“너랑 비교가 될 것 같아?”
유미나는 작은 새처럼 이변섭의 어깨에 기대며 잘난척하는 얼굴로 강수지를 바라보았다.
이런 여자를 좋아할 줄이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이변섭의 취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