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포장지를 뜯자 흰 표지에 큼지막한 글씨체로 쓰여 있는 책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국민이 지켜보는 한, 모든 음모는 산산조각 난다.]
다음 줄에 아주 작은 글씨체로 뭔가 쓰여있었다.
[제16기 공군 특수부대 교육과.]
분위기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적막만이 집안에 가득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정상철과 진미숙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책을 바라봤다.
‘왜 이런 책을 선물하는 거지?’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가 다분한 선물에 그들은 차마 표정을 풀지 못했다.
공군 특수부대에서 이런 수업을 하는 이유는 조종사들이 간첩에 의해 타락하는 경우에 종종 있었기에 사전에 교육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다. 온서우의 아버지는 열사이고 그녀의 가족은 3대째 가난한 농민인데 도대체 왜 책을 선물하냐는 말이다.
진미숙은 대뜸 헛기침하며 정재욱을 바라봤다.
“이건 네 형이 수업할 때 듣는 책이잖아. 잘못 가져온 거 아니야?”
정재욱도 이런 책을 온서우에게 선물할 줄은 전혀 몰랐는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책을 선물해 준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리고 서랍에 이 책밖에 없었어요.”
정상철은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몸을 돌렸다.
“이 자식이... 됐어, 내가 직접 물어보마.”
정상철은 아들에 대해 매우 잘 알았다. 지예슬에게 만년필을 선물한 걸 보면 배려가 없는 건 아니기에 아무 이유 없이 온서우에게 이 책을 선물할 리가 없다.
아들이 의도가 무엇이든 양녀인 온서우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게 했으니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진미숙은 재빨리 정상철의 손을 잡았다.
“서준이가 착각했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어쩌면 선물하려던 게 이 책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듯 정상철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들과 달리 온서우는 정서준이 자신에게 이 책을 준 목적을 알고 있었기에 굉장히 차분했다.
정서준은 그 어떤 생각도 갖지 말라고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다.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인 정서준은 적을 대할 땐 한없이 싸늘하고 무자비해진다.
원작에 선물을 주는 줄거리가 전개되지 않았지만 정서준은 여주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극도의 악의를 품고 있었기에 이런 책을 선물한 게 이상할 건 없다.
이제 온서우도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에 책을 받고선 일부러 활짝 웃었다.
“오빠는 저를 격려하기 위해 이 책을 선물한 게 틀림없어요. 어려운 상황일수록 주위를 둘러보라는 뜻이잖아요. 정의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나 봐요.”
“오빠의 진심을 너무 오해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온서우가 이렇게 해석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저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때 장정희가 다가와 모두에게 식사를 권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미숙은 재빨리 정상철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일단 애들이랑 밥부터 먹어요. 이러다가 음식 다 식겠어요.”
정재욱은 상황을 살펴보더니 솔선하여 식탁으로 가서 의자를 빼며 앉았다.
“배 많이 고프지? 맛있게 먹어.”
당장이라도 정서준에게 연락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그 충동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가족이 전부 식탁 앞에 앉았다.
식사를 마치고 진미숙은 지예슬과 온서우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을 살펴보았다.
정재욱은 그들의 뒤를 따랐고 장정희는 주방에서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홀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정상철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정서준에게 전화를 걸기로 결정했다.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자 정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상철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왜 서우한테 그런 책을 줬어? 무슨 뜻이야.”
정서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주제 파악을 좀 했으면 하는 마음에 준 거예요. 아빠, 온서우가 무슨 의도로 우리 집에 왔는지 정말 몰라요?”
그 말을 들은 정상철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분노하며 소파 팔걸이를 내리쳤다.
“정서준. 네가 그러고도 군인이야? 잘못된 걸 바로 잡고 싶을 땐 증거가 있어야지.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알량한 사명감에 눈이 멀었으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판단이 흐려지지 않도록 해.”
이름 석자를 불렀다는 건 화가 충분히 났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정서준은 수화기를 든 채 자세를 바로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제 판단을 믿습니다.”
정상철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디.
“네 판단이 백 프로 정확하다는 근거 있어? 잔말하고 시간 내서 집으로 한번 와.”
정서준은 단호한 말투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빠는 저런 인간을 양녀로 받아들이고 화기애애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전 못합니다. 허영심 많고 속물적인 여자는 딱 질색이거든요. 오빠가 되는 건 죽어도 싫고요.”
정상철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속물적인 여자? 이런 걸 편견이라고 하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단정 짓고 비난하는 네 행동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직접 만나봤는데 생각보다 착하고 순수한 아이였어.”
‘순수’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정서준은 웃음이 터졌다. 그는 선도동의 보건소에서 온서우의 어머니가 딸에게 뭘 가르쳤는지 직접 들었던 당사자다. 그러니 착하고 순수하다는 표현으로 온서우를 칭찬하는 말마저 역겹게 느껴졌다.
“당분간 집에 안 갈 겁니다. 재욱이한테 신경 많이 쓰세요. 이제 막 성인이 된 순수한 아이거든요. 자칫하다 양녀에서 며느리가 될 수도 있으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으면 옆에서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할 겁니다.”
아들을 혼내려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던 정상철은 그의 말 한마디에 혈압이 솟구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차분히 감정을 추스른 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훈련 열심히 받아. 동생 걱정은 안 해도 돼. 서우가 좋아할 일은 없으니까.”
퍽.
전화를 끊은 정상철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바닥에 내팽개쳤다.
반평생을 살면서 그동안 만나봤던 사람만 해도 수백 명이기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외모가 뛰어난 온서우는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가졌고 행동도 털털한 데다가 가정교육까지 잘 받았으니 절대 속물적인 여자는 아니다.
정상철은 비로소 아들이 온서우에게 편견이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통화를 마친 정서준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잔머리를 굴리는 온서우를 향한 아니꼬운 감정이 한층 더 짙어졌다.
일 년에 전화 한 번도 안 하던 정상철이 혼내려고 직접 전화를 건 게 적잖이 충격이다.
어쩌면 온서우를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서준은 차가운 얼굴로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집에 돌아가지 않는 한, 온서우의 계획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
기숙사에 도착한 정서준은 책상에 앉아 계속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깔끔하게 다려진 군복을 입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잘생긴 옆모습과 칼로 깎은 듯한 조각 같은 외모는 정말 환상적이다. 그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집중했다.
보고서를 쓰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땐 옆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확인하며 써내려갔다.
다 쓴 뒤, 그는 보고서를 치우고 사용한 물건들도 원래 위치로 돌려놓으며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이 복원했다.
모든 일을 마친 후 정서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정서준은 곧장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면 저도 모르게 그 기차로 되돌아갔다.
꿈속.
화장실의 좁은 공간에 부드러운 향기가 퍼졌고 붉은 입술이 그에게 닿자 호흡이 거칠어지며 얇은 허리를 감싼 손은 무의식적으로 조여졌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목젖을 어루만졌고 그의 길고 가는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며 가슴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