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진미숙은 군악대에서 예쁜 여자를 수없이 많이 봤다. 사람이 예뻐봤자 비슷하겠거니 생각했지만 온서우의 얼굴을 본 순간 예외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온서우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닌 들어서자마자 털털하게 자리에 앉았다. 주눅이 든 기색은 전혀 없었고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보다는 유학 마치고 돌아온 부잣집 아가씨가 같았다.
진미숙은 그제야 박은숙의 말이 이해됐다. 온서우의 외모와 끼는 국한된 작은 시골에서 지내기는 버거울 정도로 뛰어났다.
온서우를 향한 작은 불평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정상철은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말없이 지예슬과 온서우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온준현과 지석빈이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딸이 얼마나 예쁘게 컸을지 두 눈으로 확인했을 텐데...
온서우와 지예슬은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지예슬은 분위기를 살피더니 곧바로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예전에 저희 아빠가 편지에서 삼촌이 땅콩을 좋아하신다고 언급하셨어요. 이건 제가 직접 키운 땅콩이에요. 삼촌이랑 이모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네요.”
진미숙은 말을 예쁘게 하는 지예솔이 기특했다.
“속이 참 깊은 아이구나.”
정상철은 예전에 전우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식량이 부족하고 먹을 것도 없어서 땅콩을 소금에 볶아 술과 함께 곁들여 먹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사소한 추억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 없었기에 지예슬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한층 더 자애로워졌다.
지예슬을 뿌듯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무심코 옆에 있는 온서우를 바라봤다.
온서우가 들고 온 가방은 선물을 담기에는 부피가 작았다. 게다가 출발할 때 박은숙이 조바심을 냈던 모습이 떠올라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 인사하러 온 자리에 빈손으로 왔다는 건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행동이다.
이를 생각한 지예슬은 통쾌한 듯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지예슬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하자 온서우는 손에 든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마침 지예슬과 딱 시선이 마주쳤다.
원작에서는 여주의 어머니가 남편 몰래 짐을 쌌기에 들키지 않기 위해 가장 최소한의 물건만 챙겼다. 그러나 잊지 않고 은성에 도착하면 꼭 선물을 사가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조언과 달리 당시의 여주는 이 사실을 완전히 까먹은 채 빈손으로 정씨 가문에 들어섰다. 도착해서는 집안의 배치만 훑어보느라 잔뜩 움츠러들었고 눈빛에는 숨김없는 탐욕스러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에 반해 지예슬은 미리 준비한 선물을 건네며 줄곧 다정하고 예의 바른 태도였기에 단번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예슬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온서우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선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저희 집은 땅콩을 재배하지 않아서 삼촌이 좋아하는 건 준비하지 못했지만 지역 특산품을 가져왔어요. 비싼 물건은 아닌데... 이렇게 어려울 때 기꺼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봉투를 열자 팔뚝만한 훈제 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차에서 승무원과 교환한 것이다. 기차 승무원은 전국 각지의 승객을 만나기 일쑤기에 가끔 승객들과 물물교환을 하기도 한다. 온서우는 휴게실에 있을 때 마침 이 훈제 고기를 보게 되었고 돈을 조금 보태어 승무원과 교환했다.
시골 사람들은 1년에 고기 한번 먹는 것조차 버거웠으니 이런 선물을 준비했다는 건 얼마나 사려 깊은지 보여줬다.
진미숙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이런 것까지 준비했어. 네 아버지는 우리 그이와 형제나 다름없는 전우야. 그러니까 우리가 당연히 도와줘야지.”
“사람은 감사할 줄 알고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엄마가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를 어려운 상황에서 구해 주신 것에 비하면 이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록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정씨 가문을 향한 고마움은 진심이다.
정씨 가문에서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매일 정신병자와 함께 살며 고통의 늪에서 허덕였을 것이다.
철든 온서우의 모습을 보며 진미숙은 과거 자신이 떠올랐다. 진씨 가문은 대대로 사업을 이어온 탄탄한 자본가였지만 시국이 변함에 따라 살짝 흔들린 순간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권력을 이용해 진미숙과의 결혼을 협박했고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진씨 가문은 결국 같은 권세를 가진 정씨 가문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났다.
진미숙은 온서우에 대한 불만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온서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랑 우리 그이가 있는 한 아무도 감히 너한테 결혼을 강요하지 못할 거야.”
온서우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또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진미숙이 장정희에게 물었다.
“음식 준비 끝났어요? 애들도 하루 종일 기차 타서 배고플 텐데 준비 다 되었으면 얼른 식사합시다.”
장정희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다 차려놨어요. 제가 가서 재욱이 불러올게요.”
정재욱은 위층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데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이때 진미숙이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직접 갈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위층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엄마.”
정재욱은 손에 봉투 하나를 들고 소파로 다가왔다.
정상철은 손님 온 지 반나절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아들이 못마땅한지 표정이 잔뜩 굳었다.
진미숙은 남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정재욱의 편을 들며 말했다.
“서준이가 동생들 주려고 선물 준비했거든요. 재욱이는 그걸 찾느라고 이제야 내려온 거예요.”
“재욱아, 얼른 동생들한테 선물 줘야지.”
진미숙은 옆에서 눈치를 줬다.
그러자 정재욱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환하게 웃으며 온서우와 지예슬에게 인사했다.
“안녕. 난 정재욱이야.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참,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정재욱은 봉투에서 보습 크림을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네줬다.
“여자애들이 이걸 좋아한다고 하더라.”
보습 크림은 가격이 상당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쉽사리 사지 못했다. 지예슬은 마치 귀중한 보물이라도 받은 듯 감격했다.
“오빠, 고마워요. 이런 크림 처음 받아봐요.”
온서우도 보일듯 말듯한 보조개를 드러내며 달콤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그 웃음에 심쿵한 정재욱은 몸 둘 바를 모르며 당황하더니 곧바로 귀가 빨개졌다.
“괜, 괜찮아.”
정재욱은 말까지 더듬었다.
진미숙은 아들의 못난 모습이 우스운지 말없이 상황을 지켜봤다. 한편으로는 늘 털털하던 아들이 얼굴을 붉히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이쪽은 지예슬. 그리고 이쪽은 온서우. 둘 다 동생이야.”
진미숙은 정재욱에게 두 사람을 소개한 후 곧바로 그들에게 정재욱을 소개했다.
“여긴 우리 집 둘째 아들 정재욱. 이번 달에 만으로 열여덟이야.”
온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빠 맞네요. 전 다음 달에 열여덟이거든요.”
“저도요.”
원작에서 온서우는 지예슬과 동갑인데 지예슬이 온서우보다 생일 며칠이 빨랐다.
정재욱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진미숙이 그를 일찍 낳은 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되는 것보다는 오빠라는 호칭을 듣는 게 훨씬 좋았다.
“아참, 우리 형도 선물 준비했어.”
정재욱은 깜빡하기 전에 재빨리 선물을 꺼냈다.
하나는 검은색 가죽으로 포장된 선물 상자였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허름하게 포장된 책이었다.
정재욱은 선물 상자를 지예슬에게 건넸다.
“우리 형이 준비한 거야.”
지예슬은 정교한 포장을 보고선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홀린 듯이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검은색과 금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만년필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고 럭셔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너무 비싼 물건이잖아요.”
“제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요. 큰오빠한테 돌려주는 게 좋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에서 선물 상자를 결코 놓지 않았다.
이때 정재욱이 말했다.
“받아도 돼. 형이 부대에서 표창을 자주 받는데 그럴 때마다 집에 만년필이 늘어나거든. 혼자서 그걸 다 쓰는 건 불가능해. 나도 여러 개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써.”
“그렇구나...”
그 말은 들은 지예슬은 편히 선물을 받았다.
정재욱은 온서우에게 줄 책을 힐끗 보고선 살짝 망설였다.
사실 그는 정서준이 지예슬에게 값비싼 만년필을 선물할 줄 몰랐다. 이제 그걸 알게 되었으니 마음이 더 편치 않았다. 두 선물의 차이가 너무 컸으니까.
온서우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 보던 정재욱은 차마 손에 든 책을 건네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책을 건네주었다.
온서우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옆에서 지예슬이 기대 섞인 눈으로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따로 포장까지 한 걸 보면 엄청 아끼는 책인가 봐. 귀중본인가? 서우야, 얼른 열어봐.”
지예슬은 정서준이 어떤 책을 준비했는지 알고 싶었다.
사실 궁금한 건 정재욱과 진미숙도 마찬가지다. 책을 포장했다는 건 정말 아끼거나 비싼걸 뜻하기에 그 가치는 만년필에 못지않다.
“귀중본? 그게 뭔데?”
이때 정상철이 다가왔다.
진미숙은 온서우 손에 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준이가 서우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책이에요.”
정상철은 표정이 어두웠다.
“그 자식 하루 종일 조종사 관련된 책만 보고 있잖아. 이런 걸 여자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야? 차라리 실용적인 걸 준비하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포장지로 둘러싸인 책에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