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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점심시간을 이용해 원유희는 피임약을 사기 위해 약국으로 향했다. 삼둥이는 그녀에게 축복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또다시 예상치 못한 임신을 겪고 싶진 않았다. 약국에 도착한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경구피임약으로 주세요.” 워낙 변덕이 많은 김신걸이 언제 그녀를 원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때마다 사후피임약을 먹는 건 몸에 무리가 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물 한 병에 쓴 약을 넘기고 거리를 걷던 그때, 어디선가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길을 막았나 싶어 원유희는 살짝 옆으로 비켜섰지만 검은색 차량은 그녀의 옆에 멈춰섰다. ‘김신걸인가?’ 원유희의 예상과 달리 조수석에서 내린 사람은 4, 5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원유희 씨? 저 기억하시나요? 김국진 회장님을 모시는 박인하라고 합니다.” 익숙한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던 원유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어르신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 그게 지금 제가 출근 중이라.” “월차 내시죠. 회사에는 제가 대신 연락드리겠습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원유희는 성형외과에서 간단히 핸드백을 챙기고 벤츠에 몸을 실었다. 뒷자리에 앉은 채 주위의 풍경을 살피는 원유희는 마음이 착잡할 따름이었다. 어렸을 때 김영의 집에서 살 때, 김국진은 이미 일선에서 물러서 교외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김국진의 얼굴을 직접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악마 같은 김신걸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 같아선 김씨 집안 그 어떤 사람과도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원유희를 부른 이유라면……. ‘아마 김풍그룹 일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날 찾으시는 걸까?” 잠시 후, 별장에 도착한 원유희가 텅 빈 마루에 어색하게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왔구나.” 지팡이를 짚은 김국진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든이 넘는 나이임에도 김씨 일가의 주인답게 그 풍채만은 여전했다. “할아버님……” 원유희가 김국진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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