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송연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운성시에 다른 병원도 있는데 하필이면 왜 우리 병원이야? 게다가 굳이 나한테 진료를 보는 이유는 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온서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생팬과 기자들에게 가로막혔다. 다행히 병원 측에서 미리 경비원을 배치한데다 이정호까지 에스코트해서 가까스로 내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송연아는 다른 의사한테 떠넘겼지만 그녀와 친구라는 온서우의 한 마디에 원장이 직접 연락이 와서 진료를 보라고 못을 박았다.
검사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결과를 확인해보니 전부 정상이었다.
“임신 예정 주수는 10주 3일 차야. 처음으로 받는 검사인 것 같은데 산모 수첩 작성하고 가.”
그리고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이정호를 바라보았다.
“구체적인 절차는 뒤쪽 벽면에 붙어 있으니까 확인하고 따라 하면 돼.”
이정호는 흘긋 쳐다보더니 귀찮은 듯 말했다.
“네가 대신 다녀와. 난 서우를 돌봐야 해.”
송연아는 고개를 숙였다.
“산모 수첩은 임산부나 가족이 작성하는 거야. 의사의 소관은 아니지.”
“지금 서우가 도움이 필요한 게 안 보여?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환자 가족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는 건 심부름꾼이나 하는 노릇이지.”
이정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다음 분!”
이정호가 입을 떼려는 찰나 온서우가 나섰다.
“연아 씨, 정호를 너무 부려 먹지 않을 테니까 이만 화 풀어요.”
송연아는 온서우를 바라보았다. 무려 15년 동안 친구로서 이정호를 붙잡아두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더니 마음이 식어갈 때쯤 다시 불을 지폈다. 게다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정호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는 그녀와 절친이라고 말했다.
이내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서우 씨 약혼자 아닌가요? 부려 먹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내가 왜 화를 내요?”
“혹시 나 때문에 둘이 싸웠어요?”
“아니요. 우린 이미 헤어졌죠.”
“연아 씨, 오해예요. 정호는 단지 날 도와주려고...”
송연아는 손을 들어 온서우의 말을 끊었다.
“서우 씨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 것 같아요? 헤어진 이유는 따로 있어요.”
“송연아! 말투가 건방지네? 서우한테 사과해.”
이정호가 버럭 외쳤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화가 비로소 폭발했다.
“꺼져.”
결국 무례한 태도 때문에 이정호는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전화를 걸어 컴플레인했다.
둘이 진료실을 나서자 송연아는 원장실로 불려갔다.
“우리 병원이 이성 의료재단 소식인 건 알고 있지?”
송연아는 묵묵부답했다. 어찌 모르겠는가?
“방금 연아 씨가 진료한 사람은 인기 여배우 온서우야. 그리고 같이 오신 분은 다름 아닌 이성 그룹 둘째 도련님이시고.”
박상태는 말을 이어가면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본인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래서요?”
송연아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물었다.
박상태는 책상을 내리쳤다.
“딱 한 마디만 물을게. 여기서 일하기 싫어?”
“고작 무리한 요구를 제안해서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이정호의 심기를 건드려 해고될 위기에 처한 거라면 노동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에요.”
“이...! 역시 아직 어려서 생각이 짧구나. 무려 이성 그룹 둘째 도련님이셔. 한낱 산부인과 의사 따위가 상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환자가 기다리고 있어요. 만약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
“어휴, 저 황소고집!”
원장실을 나서는 그녀를 보자 박상태가 서둘러 말했다.
“그 여배우가 연아 씨를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은데 병원에 자주 들락거리기 불편하니까 앞으로 주치의로서 직접 댁에 가서 진료해.”
“싫어요.”
“이미 정해졌어.”
진료실로 돌아간 송연아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정호가 대체 왜 이런 짓을 꾸미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난 8년 동안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죄인가? 정녕 괴롭힘을 당해도 싸다는 말인가?
“자, 산모 수첩 만들었어.”
이정호와 온서우가 다시 찾아올 줄 몰랐고, 심지어 얼굴에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송연아는 황당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마지못해 수첩을 건네받아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산모가 주의해야 할 사항은 수첩에 나와 있으니까 확인해 봐. 그리고 다음번 검사일도 적어둘 테니까 예약 시간에 맞춰서 오면 돼.”
말을 마치고 나서 수첩에 날짜를 적었다.
“서우가 한가한 줄 알아? 나도 바쁜 사람이야. 미리 연락하면 서우 데리고 올게.”
이정호가 말했다.
글을 써 내려가던 송연아의 손이 움찔했다.
“여기서 아마도 내가 제일 바쁘지 않을까? 그리고 남의 일에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
“우리가 남이야? 하여튼 잊지 말고 연락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정호.”
송연아는 고개를 들어 이정호를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오만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쳤는데 심장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린 이미 헤어졌어. 더는 실랑이 벌이고 싶지 않으니까 컴플레인 다시 하든 말든 알아서 해. 난 엄연히 병원 규칙에 따라 환자를 접대하는 거라 특별 대우는 없어.”
이정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 그녀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듯싶었다.
“명심할게요.”
이때, 온서우가 이정호의 손을 끌어당기며 너그러운 아량을 베푸는 척 말했다.
“연아 씨,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별말씀을. 의사로서 당연한 일이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사생팬과 기자들이 우르르 들이닥치더니 휴대폰을 들고 온서우와 이정호를 카메라로 찍었다.
“온서우 씨, 현민수 배우님과 정말 친구 사이 맞아요? 두 사람이 밤늦게 호텔에 드나든 이유는 뭐죠?”
“이정호 씨가 프러포즈한 게 사실입니까? 혹시 그냥 보여주기식은 아닌가요?”
“두 분 진짜 사귀어요? 온서우 씨가 단지 친구 사이라고 해명한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이밀었고 엎치락뒤치락 난리가 났다.
이정호는 온서우를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지만 인파에 휩쓸려 휘청거렸다.
경비원이 밖에서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라 송연아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서둘러 책상 앞으로 걸어가 이정호와 함께 온서우를 막아섰다.
그녀를 발견하자 이정호는 온서우를 떠넘기며 말했다.
“서우를 지켜줘.”
말을 마치고 나서 뒤를 돌아 사생팬과 기자들을 향해 버럭 외쳤다.
“전부 나가세요!”
핫이슈에 눈이 먼 사람들이 고분고분 따를 리 있겠는가? 결국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온서우의 앞까지 바짝 다가왔고, 뒤에서 갑자기 잡아당기는 바람에 한창 옥신각신하더니 실수로 그녀와 부딪혔다.
송연아는 서둘러 앞을 가로막다가 두 사람에게 밀려나 책상 모서리에 허리가 세게 찍혔다.
“악!”
안 그래도 아픈데 이정호가 온서우를 끌어당기며 다시 한번 튕겨 나갔고 모서리와 부딪히면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 이정호가 온서우를 끌어안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