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계집애야.” 수화기 너머 아주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면서도 약간 낯선 느낌이 들었다. 순간 내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났다. “시준 오빠.” 번호를 바꾸면 강씨 가문의 사람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지훈의 맏형이 이 번호를 알고 있을 줄 생각 못했고, 그가 날 연락할 줄은 더더욱 예상 못 했다. “내 전화를 저장했나 보네. 날 잊지 않았어.” 시준 오빠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는 강지훈보다 2살 컸는데, 외국 가기 전에, 날 엄청 챙겨주었다. 그리고 날 ‘계집애’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난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왠지 그의 말투에서 원망하는 듯이 느껴졌다. 시준 오빠가 금방 외국에 갔을 때, 나도 가끔 그와 연락하면서 상황을 물어보곤 했다. 그러다 차차 연락을 끊게 되었다. 오빠는 원래부터 주동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가족과의 연락도 적은데, 난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 나랑 강지훈이 헤어진 일 때문에 전화 왔겠지. 아무리 가족과 연락이 적다고 해도, 중요한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알려주기는 한다. “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 내 성격이 직설적이다 보니, 혼자 추측하는 것보다 그냥 묻는 걸 더 좋아했다. “나한테 돈 빌려서 요금 낸 거 기억 안 나?” 그의 말에 나는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 역시 똑똑하네. 요금 한번 내준 번호를 10년이나 기억한 거야? 부모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아빠의 핸드폰을 유물로 계속 남겨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번호가 정지된 걸 알고 요금을 낼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땐 돈이 없었고 미연 이모랑 석진 삼촌한테 달라고 하기 민망해서 시준 오빠한테 돈을 빌렸다. 내가 그 돈으로 이상한 일을 할까 봐, 돈을 빌린 의도를 물어봤다. 시준 오빠는 요금을 내고 싶단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나랑 같이 갔는데, 마지막엔 나를 도와 요금을 내주고 이 번호까지 기억했다. 솔직히 오빠가 요금을 내준 일은 벌써 까맣게 잊었다. 그래서 일부로 장난하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