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안희연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푸른 네온 불빛이 여자의 아름다운 옆얼굴을 비추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듯한 연약함을 자아냈다.
“누가 알겠어? 다들 내가 혼자 꾸민 짓이라고 생각하잖아. 계략을 써서 억지로 그 자리 차지했다고.”
결혼 3년 차에 이혼을 앞두고 있지만 안희연은 아직도 그날 왜 '우연히' 웃어른들에게 딱 걸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친놈들 신경 쓰지 마!”
나미래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자, 네 싱글 복귀를 축하해볼까?”
...
2층, VIP룸.
다른 사람들은 신나게 놀고 있었지만 고현준은 혼자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도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전화를 끝내고 돌아온 노태윤은 구석으로 가 친구 옆에 앉았다.
“아래층에 어떤 여자가 싱글 복귀 기념으로 전 손님에게 술을 돌리고 있어.”
고현준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있던 몇몇 도련님들은 귀가 쫑긋 서서 고개를 쭉 빼며 물었다.
“누구야? 누구?”
이런 술집에서 모든 손님에게 술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대개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분명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일 터였다.
노태윤은 잘생기고 점잖은 외모에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나미래.”
“나미래가 하정찬이랑 이혼한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문을 열고 나가 구경하러 갔다.
노래가 끝나자, 메인 보컬이 마이크를 들고 외쳤다.
“여러분, 이 아가씨의 베프가 결혼이라는 무덤에서 드디어 탈출한 걸 다시 한번 축하해 주세요! 싱글 만세!”
잠깐.
나미래의 친구?
나미래와 친하게 지내면서 결혼한 사람은 안희연밖에 없잖아?
모두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고현준에게로 향했다. 다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고현준은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아래층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그는 한눈에 안희연을 찾아냈다.
그녀는 홀터넥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백조처럼 아름다운 목선이 더욱 돋보였다. 멀리서도 그녀의 완벽한 몸매와 우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현준이 지켜보는 잠깐 사이에도 남자 일곱 명과 여자 두 명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많았다.
“현준 형, 희연이랑 이혼할 거야?”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현준의 얼굴에는 항상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교적인 미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희미한 미소마저 사라졌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그래?”
그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모두는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나미래가 안희연을 위해 열어준 축하파티잖아...
그러니 너랑 안희연이 아니면... 안희연이 다른 사람과 이혼한단 말이야?’
고현준은 고개를 숙여 문자를 보낸 후, 난간에 손을 짚고 태연하게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서서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여러 명의 남자들 사이에 서 있는 고현준을 발견했다.
...
모두가 고현준의 속마음을 헤아리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렸다.
흰색 하이힐을 신은 안희연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에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아름다웠다. 지금 그녀의 얼굴에 서린 차가운 분노만 아니라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가운 표정마저 아름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고현준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안희연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의 앞에 서더니 마치 눈으로 구멍을 뚫을 듯 그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내 고현준이 보낸 문자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문자 내용은 이랬다.
[준택이 변호사는 구했어?]
걱정하는 척하지만, 협박하는 거였다.
술기운에 감정이 격해진 안희연은 고현준의 넥타이를 잡고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꺼냈다.
“당신, 제정신이야?”
1층에서 ‘그리움’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그대를 위해 산에 올라 무덤을 쓸고, 변함없이 그대를 위해 소복을 입을게요’
고현준은 혀를 차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죽은 줄 알겠어.”
이 가사는 완전 남편 장례식 분위기였다.
“뭔 소린지 모르겠네.”
안희연은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는 고현준의 손목을 잡고 옆에 있는 빈방으로 끌고 갔다.
“따라와!”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고현준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작은 손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에 닿는 섬세하고 따뜻한 감촉이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안희연은 그를 끌지 못하자 노려보았다.
“빨리 와!”
“사모님, 우리 사이에 이러는 거 적절하지 않아.”
고현준은 그녀에게 이혼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눈앞의 여자를 내려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아함과 나른함이 뒤섞인 그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고현준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착각에 빠졌다.
“우리는 법적으로 부부인데, 뭐가 적절하지 않다는 거야?”
안희연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현준은 대꾸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려 했다.
이때 안희연이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순간 고현준의 담배를 든 손이 멈췄고 붉게 타오르는 담뱃불이 공중에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마치 떨리는 심장처럼 보였다.
안희연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현준 씨, 내가 지금 이 사람들 앞에서 당신에게 강제로 키스해도 아무 문제 없어.”
꺅! 강제 키스라니!
짜릿해!
다른 사람들은 환호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고현준이라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다른 곳을 쳐다봤다.
안희연이 가까이 다가오자 고현준은 그녀에게서 진한 술 냄새를 맡았다.
“술 마셨어?”
고현준은 그녀가 얼마나 마셨는지는 몰랐지만 확실히 취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할 리 없었다. 안희연은 예의범절에 꽤 고지식한 면이 있는 여자였으니까.
그는 시선을 드리우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아름다운 눈은 촉촉하게 빛났고 뺨은 발그레했으며 작고 귀여운 입술과 쇄골, 옥처럼 흰 피부까지, 어느 하나 매혹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현준은 갑자기 담배를 끄고 여자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는 강압적으로 그녀를 품에 안고 옆에 있는 빈방으로 데려갔다.
안희연은 키도 작고 다리도 짧아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다.
“현준 씨! 현준 씨 이거 놔...”
쾅!
문이 닫히는 순간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싸우는 거 아니겠지?”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고 결혼까지 강요한 여자가 죽으라고 저주하는데, 가만히 있겠냐?”
“그만해!”
노태윤은 웃으며 말렸다.
“다들 놀아! 쓸데없는 걱정들 하지 말고!”
안희연이 A 국에 유학 갔을 때, 고현준은 몰래 한식을 잘하는 유학생을 룸메이트로 붙여줬다. 그녀가 서양 음식 때문에 고생할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현준은 아직 안희연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런 고현준이 안희연을 때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