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마침 디저트를 가져온 아르바이트생은 그 말을 듣고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안희연을 바라보았다.
안희연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처럼 보이는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그녀가 누군지 기억해 내기도 전에, 아르바이트생은 재빨리 디저트를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안수지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고 커피잔을 쥔 손가락은 너무 세게 힘을 준 나머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희연아, 잊지 마. 병원에 누워 계시는 이 씨 아주머니는 아빠가 매달 병원에 돈을 부쳐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
숨 막히는 분노에 안희연의 즐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미숙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가정부였다. 부산에서부터 제도까지 따라와 돌봐주셨지만 3년 전 그녀를 구하려다 식물인간이 되셨다. 당시 안희연은 미성년자였기에 그녀 대신 아버지가 후견인이 되었고 이미숙의 생사는 온전히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한편.
아르바이트생은 휴게실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사촌 오빠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빠, 천만 원 보내주면 희연이가 오빠를 평가한 멘트 알려줄게!]
...
출장에서 돌아온 고현준은 집에 오자마자 신발장에서 안희연의 신발들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의 뒤를 따라 업무 보고를 하던 비서 주성빈은 고현준이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입을 다물었다.
빠르게 주변을 둘러본 고현준은 안희연의 개인 물품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감히 도망쳤어?’
고현준은 이를 악물었다. 가슴속에서 불길 같은 화가 치솟았다.
“희연이 어디 있어?”
고현준은 주성빈에게 물었다.
제도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곧 누군가가 먼저 찾아왔다.
“대표님, 사모님은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주성빈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고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주성빈은 황급히 말했다.
“그게 아니라 사모님은 병원에 정 대표님을 찾아가셨어요. 안준택과 정씨 가문 막내아들 일을 무마하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
병원에서.
“정 대표님, 도련님 일은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준택이가 감옥에 몇 년 간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비극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손자분께서 A 국 해로우 스쿨 입학을 희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A 국 유학 시절 은사님께서 교육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분이라 손자분의 추천서를 부탁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희연은 먼저 사과하고 다음으로 당근을 제시했다.
정씨 가문은 돈은 많지만 권력이 없는 신흥 부자였다. 그들은 다른 경로로도 입학 추천서를 받을 수는 있지만 사업하는 사람에게 인맥은 갚기 어려운 빚과 같았다.
그러니 안희연의 제안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사모님, 조건은 맘에 드는 데 아니면...”
정 대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을 펼쳤다.
“우린 고 대표님 덕에 먹고사는 처지라 먼저 고 대표님과 상의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 대표의 의도는 분명했다. 고현준이 합의를 거부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고현준의 말을 따라야 했다.
안희연은 서둘러 리버 별장으로 돌아갔다.
고현준은 방금 출장에서 돌아온 듯 셔츠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풀어 한쪽에 놓여 있었고 셔츠 윗단추는 몇 개 풀어져 섹시한 목과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현준 씨, 당신 무슨 뜻이야?”
안희연은 화가 나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고현준이 눈을 떠보니 그녀는 이미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안희연이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는 모습은 그에게는 마치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보였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녀가 집을 나간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집 안에 서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른하고 거만하게 말했다.
“안몽실, 처음에 나한테 접근한 건 너였는데 이용하고 버리기야? 내가 제비냐?”
몽실이는 안희연의 애칭이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듯 눈을 흘기며 고개를 돌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비는 당신보다 훨씬 말을 잘 듣지.”
고현준은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돌리게 하며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안희연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의 품 안으로 넘어졌다. 당황한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양손을 짚었다.
손끝에 탄탄한 근육과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고 코끝에는 그의 체취가 가득했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와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현준 씨, 준택이도 수지 친동생이잖아. 난 지금 수지의 친동생을 위해 애쓰는 건데 당신이 나를 괴롭히고 싶더라도 이럴 때는 아니잖아. 안 그래?”
이미숙의 치료는 중단될 수 없었다. 인공호흡기를 떼는 순간, 돌아가실 것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마.”
그의 태도는 내가 널 괴롭히는 데 시간을 가리겠냐는 듯했다.
“그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안희연은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이혼을 제안해서 화가 난 거야?”
화가 나서 일을 방해한 게 분명했다.
고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차갑고 어두웠다.
안희연은 예쁜 얼굴을 쳐들고 해맑게 웃으며 고의로 물었다.
“현준 씨, 설마 나랑 몇 번 자더니 날 좋아하게 된 건 아니겠지?”
“그래.”
고현준은 가볍게 대답했다.
순간 그녀의 미소가 굳었다. 안희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고현준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고 살짝 힘을 주자 여자는 그의 품에 완전히 갇혔다.
“나는... 네 몸이 좋아.”
그는 평가하듯 말했다.
“지금까지는 만족스러워.”
그 말은 마치 그녀가 하나의 도구인 것처럼, 그녀를 물건 취급하고 깔보는 듯한 말투였다.
지난 1년 동안 그의 태도는 항상 강압적이었다.
안희연은 그를 밀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고현준, 이 나쁜 놈!”
고현준은 안희연의 욕설에 신경 쓰지 않았다.
“몽실아, 정씨 가문과 협상할 자격이 있는 건 오직 고씨 가문 사모님뿐이야. 이 일을 어떻게 할지는 네가 선택해.”
...
술집은 울긋불긋한 조명 아래 요란스러웠고 무대 위 밴드는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안희연은 소리를 질러야만 친구에게 자신의 분노를 전달할 수 있었다.
“걔 제정신이야? 너도 걔 미쳤다고 생각하지! 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고 위자료 한 푼 안 받고 빈손으로 나가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나보다 쿨한 전처가 어디 있어? 걔 대체 뭐가 불만인데? 처음에 충동적으로 걔랑 잔 건 내 잘못이야, 인정해. 몇 번이나 인정했어! 근데 날 자꾸 비꼬고 빈정거리고,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일부러 나 괴롭히기나 하고. 할 짓도 없나 봐? 진짜 미친놈이야!”
“욕이라고는 미쳤다는 말밖에 할 줄 몰라?”
나미래는 절친의 착한 심성이 안타까웠다.
“자기야, 좀 더 살벌한 욕 좀 배워 봐.”
안희연은 화가 나서 위스키를 한 잔 더 비웠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희연아, 혹시 고현준이 이혼하기 싫은 건 아닐까?”
나미래가 갑자기 말했다.
안희연은 마시던 술에 사레가 들렸고 눈은 놀라서 동그랗게 커졌다.
2초 후, 격렬하게 기침을 쏟아낸 후,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럼 걔 진짜 미친 거네! 고현준은 원래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거야. 너도 알잖아.”
결혼식 다음 날, 고현준은 M 국으로 떠나 사업을 키웠고 1년 후, 안희연이 교환학생으로 A 국으로 가고 나서야 그는 M 국에서 돌아왔다.
그러니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 보낸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고현준이 그녀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미래는 그런 안희연을 보며 안쓰러워 마음속으로 고현준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욕했다.
“아니 근데, 도대체 누가 너랑 고현준이 침대에서 한창 있을 때 걔 할머니한테 알려준 거야?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알았다는 건 누가 고자질했다는 거잖아. 그냥은 절대 알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