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고현준은 굳은 얼굴로 따뜻하고 큰 손으로 여자의 가늘고 연약한 목을 어루만졌다. 마치 연인을 어르듯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동시에 먹잇감의 숨통을 끊기 직전의 맹수처럼 위협적이기도 했다.
마치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목을 꺾어버릴 듯한 분위기였다.
“결혼하자고 한 건 너였어. 근데 이혼하자는 것도 너라니...”
그는 그녀에게 바싹 다가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정함과 위험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새 남자라도 생겼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안희연은 움츠러들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사람은 아니고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사람이야.”
고현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탐색하듯 훑어보며 흥미로운 듯 물었다.
“그래? 누군데?”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야.”
“말해 봐.”
죽음처럼 차분한 그의 말투는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만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선배야.”
안희연은 지금 남편과 자신의 새로운 애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애인을 말이다.
고현준은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비웃었다.
“희연아, 넌 원래 금방 질리는 성격이잖아.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 이번 남자는 몇 날이나 갈 것 같아?”
금방 질리는 성격이라고?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쭉 좋아한 사람은 그였는데 그의 눈에는 그녀가 바람둥이로 보인단 말인가?
안희연은 더 이상 반박하고 싶지 않아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수지가 돌아와서 내가 알아서 자리를 비켜준다는데 당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착하다고 칭찬해 줘야 하나? 안 여사?”
180이 넘는 큰 키의 고현준이 똑바로 서자 안희연은 그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
역광 때문에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주변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안 여사라는 호칭은 분명한 조롱이었다.
안희연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고현준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전화 내용을 들으며 가끔 “응”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인쇄된 이혼 서류를 탁자 위에 던지고는 전화를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몇 분 후, 그는 양복 재킷을 들고 내려와 외출 준비를 했다.
안희연은 이혼 서류를 다시 집어 들고 맨발로 현관까지 쫓아갔다.
“서류에 먼저 사인해주면 안 돼?”
고현준은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이혼 서류를 훑어봤다.
재산 분할에 대한 내용이 없는 걸 보니 안희연은 위자료 없이 빈손으로 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내용은 간단해서 고현준은 한눈에 모든 내용을 파악했다.
“위자료도 없이 나가겠다고? 안 여사, 손해 보는 장사도 이렇게는 안 해.”
그는 친절하게 가르치듯 말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은 기다려주지 않잖아.”
안희연은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그녀는 이 잘못된 관계를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고현준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그자가 그렇게 좋다는 거야?”
안희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에게 서명을 재촉했다.
“안 여사, 넌 법대 수재인데 나 같은 문외한이 함부로 너랑 계약할 순 없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고현준!”
안희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소리쳤다.
“믿든 말든, 3년 전 당신과 결혼하려고 계략 같은 거 꾸민 적 없었어!”
“그래?”
남자는 가볍게 두 글자를 내뱉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안희연은 그가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 역시 엄마도 없고 아빠 사랑도 못 받고 자란 몰락한 재벌가 딸인 그녀가 고현준과 결혼한 건 엄청난 행운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사랑해 온 그녀는 그를 원하지 않는 결혼 생활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안희연은 부산 출신으로 16세에 결혼 가능 연령이 되자마자 18세에 고현준과 결혼했다. 이제 21살, 이혼을 준비하며 그녀는 제도대학교 법학과 4학년을 앞두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그녀는 리버 별장에서 학교 근처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틀 후 저녁, 그녀는 문자 하나를 받았다.
[희연아, 내일 오후 2시에 시간 돼? 너한테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뒤에는 주소가 첨부되어 있었다.
...
제도의 어느 고급 티 카페.
창가 자리에 앉은 안수지는 샤넬의 블랙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생머리에 정돈된 화장은 지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검은색 손목 보호대가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감싸고 있었다. 예전에 크게 다쳤던 곳으로 회복된 후에도 에어컨 바람을 쐬면 여전히 통증이 쉽게 재발했다.
안희연은 자신의 시선을 그녀의 손목에서 떨어지도록 애써 노력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희연아, 안 올 줄 알았는데 와줬구나.”
안수지는 온화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도의 상류층 사람들은 모두 안수지가 좋은 언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의 안희연도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는 안 오려고 했어.”
안희연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간과 장소를 문자로 통보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녀는 안수지가 학교까지 찾아오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억지로 나온 것이었다.
안수지는 잠시 놀란 듯하다가 곧 웃으며 칭찬하는 듯이 말했다.
“그래, 현준이랑 결혼하고 나니까 말하는 데도 힘이 붙었네. 예전엔 나한테 이렇게 말도 못 했잖아.”
안희연은 예전에 못 했던 게 아니라 바보처럼 그녀를 언니로 여기고 따랐던 것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빠 엄마가 부탁하셨는데 준택이 일, 현준이한테 얘기했니? 다음 주면 재판인데 시간이 없어.”
“준택이는 고의 상해야. 빼도 박도 못하는 일이니 누굴 찾아가도 소용없어.”
안희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서둘러 안수지의 어머니와 재혼했다. 안희연보다 두 살 많은 안수지는 안씨 성을 따르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안준택은 버릇없이 자라 올해 갓 18살이 되었다. 지난달 그는 정씨 가문의 막내아들과 여자친구 문제로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상대의 눈을 다치게 해 실명에 이르게 했다. 이 일로 정씨 가문에서는 안준택을 감옥에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희연아, 너는 변호사이니 이런 일은 조작할 여지가 많다는 거 알잖아. 정씨 가문은 고씨 가문 눈치만 보는 집안인데,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언니는 한밤중에도 전화 한 통으로 내 침대에서 현준 씨를 불러낼 수 있잖아. 내가 보기엔 언니가 직접 부탁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게다가...”
안희연은 잠시 말을 멈추고 턱을 괴고는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이제 안씨 가문을 위해 현준 씨에게 부탁할 입장이 아니야. 우리 이혼할 거니까.”
“너희... 이혼한다고?”
안수지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희연은 우스웠다.
아름다운 눈망울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말이다.
“현준 씨가 말 안 해줬어?”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안수지에게 다가가 마치 놀란 듯이 말했다.
“어머! 언니, 그럼 혹시 그이가 다른 개를 키우는지 조심해야겠어. 이렇게 중요한 일도 얘기 안 해주고!”
안수지는 자신이 개에 비유된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희연아, 나와 현준이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야.”
안수지는 안희연의 이혼 얘기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안희연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너 그렇게 애써서 현준이 침대로 들어가 온갖 방법 다 해서 고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에 올랐잖아.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절대 안 떨어지려고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안희연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나 이제 그의 기술에 질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