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손형복은 안희연에게 며칠 동안 할 일 목록과 각 업무의 마감일을 알려주었다. 업무량은 사회 초년생인 안희연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정직원이라도 시간이 꽤 걸릴 만큼 많았다.
민도현은 안희연보다 세 학번 위인 제대 직속 선배였다. 다른 사람들이 회의실을 떠나자 그는 안희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희연아, 손 변이 널 좀 괴롭히는 거 같지 않아?”
안희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가 인턴이라서 프로젝트팀에 폐를 끼칠까 봐 그러는 걸까요?”
민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로펌에 손 변 여자친구가 인턴으로 있는데 손 변은 원래 자기 여자친구를 팀에 넣으려고 했었어. 그런데 대표님이 널 넣은 거야.”
안희연은 바로 알아들었다.
알고 보니 손 변은 꼬장 부리는 거였다.
“희연아, 뭐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내가 잘 챙겨줄게.”
민도현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친절하게 말했다.
안희연은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다.
태광 인수합병 건은 두 개의 대기업 합병에 관한 것이었고 피인수 기업 산하에는 여러 개의 자회사가 있었다. 손형복이 안희연에게 분담한 업무는 그녀에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전에 이 프로젝트팀에 속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를 숙지하는 데 시간이 꽤 필요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려운 법이니 안희연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
점심시간.
고현준은 평소 최고층 사장실에서 개인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는데 오늘은 몇몇 임원을 데리고 갑자기 식당에 나타나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손형복 등 법률사무소 직원들은 식당 입구 쪽에 앉아 있다가 고현준과 마주쳤다.
“고 대표님, 진 팀장님, 장 팀장님...”
손형복은 즉시 일어나 갑들과 한 명씩 인사를 나누었다.
법무팀장도 손형복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고현준은 아무 말 없이 변호사 팀원들을 쭉 훑어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손 변호사님, 팀원들이 이것보다 더 많지 않습니까?”
주성빈이 고현준의 뒤에 서서 물었다.
“네? 저희 팀원들은 다 여기 있습니다. 여기 식당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밥 먹는 데 아주 열정적입니다!”
“아침 회의 때에는 안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대표님께 자료를 드렸던 것 같은데요.”
손형복은 이런 사소한 일까지 묻는 상대방에 당황하며 속으로 안희연을 탓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안희연 씨 말씀이시죠? 지금 좀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어서 일을 끝내고 식사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로펌은 업무 강도가 좀 높아서요.”
주성빈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모님은 A 국처럼 음식이 형편없는 곳에서도 굶지 않으셨는데 자기 회사에서 밥도 못 먹는다니. 말도 안 돼!’
주성빈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손 변호사님, 일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밥은 꼭 챙겨 드셔야죠. 우리가 드린 프로젝트 기한 아직 널널하잖아요?”
고성 그룹 임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주 비서가 왜 을의 직원이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신경 쓰는 거지? 설마... 고 대표님의 지시인가?’
손형복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네, 네! 물론 저희에게 압박을 주신 건 아닙니다만 저희 로펌은 원래 자기 계발에 빡세거든요.”
주성빈은 고현준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은 무표정인데 입술을 꾹 다문 거 보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손형복은 갑 쪽 사람들이 안희연한테 신경 쓰는 걸 눈치채고 다음 날 그녀를 시켜서 법무팀장에게 서류를 갖다 주고 눈도장 찍게 했다.
법무팀장도 눈치 빠르게 고 대표랑 주 비서의 이상한 행동을 떠올리고 안희연이 가져온 서류에 서명한 후 말했다.
“안 변, 이 서류는 내가 확인했는데 문제없어요. 근데 고 대표님 결재가 필요하니 사장실로 좀 갖다 줘요.”
안희연은 거절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몇 초 후 갑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괜히 찍히면 안 되니까.
안희연이 법무팀장 사무실에서 나가고 몇 분 뒤, 법무팀장은 갑자기 생각났다. 그 예쁜 아가씨에게 사장실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법무팀장은 하는 수 없이 주성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아, 괜찮아요. 지금 봤어요.”
주성빈은 마침 사장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안희연이 서류를 들고나오는 걸 봤다.
“다행이네요!”
법무팀장은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어라? 내가 사장실이 어딘지 말 안 해줬는데 그 아가씨는 어떻게 찾아갔지?’
어떻게 찾아갔을까?
고성 그룹 건물에서 안희연이 그나마 익숙한 곳은 사장실이었다.
“사모님!”
주성빈은 황급히 마중 나왔다.
안희연은 주변을 살피고 다행히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주 비서님, 업무 중에는 제 직책으로 불러주세요.”
“지금 직책이 어떻게 되십니까?”
주성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책은 없습니다. 안희연 씨거나 희연이라고 불러주세요.”
사모님만 아니면 뭐든 괜찮았다.
주성빈은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말했다.
“안 변호사님, 점심 안 드셨어요? 식당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면...”
“식당에서 현준 씨 마주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안희연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냥 일이 많아서 빨리 끝내려고요. 이건 고 대표님 결재가 필요한 서류니까 주 비서님께서 전달해 주세요.”
주성빈은 받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사모님, 아니, 안 변호사님, 이런 외부 서류는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고 대표님께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바로 소통할 수 있도록요.”
안희연은 의아한 눈으로 주성빈을 몇 초간 바라보았다. 주성빈이 업무 관련해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사장실로 향했다.
먼저 노크하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자 주성빈은 그제야 안희연을 데리고 문을 열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서류를 가져오셨습니다.”
안희연: “...”
‘조금 전에는 안 변호사라고 부르지 않았나?’
주성빈에게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안희연을 보고 고현준은 잠시 당황했다.
그는 안희연이 직접 가져와야 할 서류가 또 뭐가 있을지 몰라 물었다.
“이혼 서류?”
“아니.”
안희연은 이 상황이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
“이혼 서류는 깜빡했어. 다음에는 꼭 챙길게.”
주성빈: “...”
그는 조용히 물러 나와 사장실 문을 닫았다.
“저희 로펌 서류를 전달하러 왔습니다.”
안희연은 정중하게 두 손으로 고현준에게 서류를 건넸다.
“고 대표님, 검토 부탁드립니다.”
고현준은 다리를 꼬고 가죽 의자에 여유로운 자세로 기대앉아 안희연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원래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자세부터 표정까지 완전 갑의 포스였다.
안희연은 잠깐 생각하다가 을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서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녀가 업무 내용을 보고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학생 같았다. 마치 강의실에서 PPT 발표를 하는 모범생처럼 순수해 보였지만, 보고 내용은 유창하고 간결해서 서류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한 것이 분명했다.
고현준은 책상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뚫어지게 보다가 손짓했다.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