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안희연은 심호흡을 하고 로펌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애써 품위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안녕하세...”
그녀가 ‘요’라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고현준은 이미 시선을 거두고 의뢰인 특유의 거만한 태도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임원들을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안희연: “...”
‘개자식!’
...
프로젝트 팀원들은 처음부터 고성 그룹 대표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그들이 가버리자마자 사무실은 웅성거렸다.
“대박, 대박! 대표님 진짜 잘생겼다!”
“엄청 젊어 보이네. 결혼했나? 진짜 능력 있는 남자네!”
“꿈 깨. 고 대표님 애인 있거든.”
그 말에 안희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컴퓨터를 켜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말하는 사람은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예쁜 여자 주가예였다. 집에서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아는 것이 많았다.
주가예는 턱을 치켜들고 독점 정보를 가진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대표님 애인도 부잣집 아가씨래. 고 대표님하고 소꿉친구라고 하던데 이름이 수지인가 그랬던 것 같아.”
안수지.
아, 소문 속 고현준의 애인은 그의 아내인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안희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안도하는 마음이 큰지, 자조하는 마음이 큰지 알 수 없었다.
“애인이 있다고 뭐 어때? 부자들은 믿을 수 없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
“좀 전에 고 대표님이 희연 씨를 쳐다봤잖아. 희연 씨 예쁘니까!”
안희연은 갑자기 왜 본인자기 얘기가 나오는지 몰라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고 대표님은 딱 봐도 무섭고 재미없는 스타일이에요. 제 스타일 아니라고요.”
“어휴, 네가 뭔데 골라?”
주가예는 눈을 흘겼다.
“고 대표님이 너 같은 애를 보겠어!”
안희연: “...”
안희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곧 이혼할 사이잖아.’
그녀는안희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약지에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서 가방에 넣었다.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30분 후.
로펌 팀과 법무팀은 회의실에서 만나 예비 회의를 진행했다.
모두 자리에 앉기도 전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며 허리가 얇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고 대표님께서 어떻게...”
법무팀장은 갑자기 나타난 고현준을 보고 황급히 일어나 맞이했다.
주성빈이 대신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참관하러 오셨습니다.”
왜 갑자기 참관하러 왔는지는 부하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안희연은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아니, 이런 초기 회의에 중요한 결과 보고도 아닌데 고현준은 ‘뭐 하러 참관한단 말인가? 한가한가?’
아까 동료들이 수군거리던 얘기가 생각나서 안희연은 그가 꼴 보기도 싫었다.
다행히 그녀는 인턴이었기에 안희연은 조용히 구석에서 고현준과 가장 먼 자리에 앉았다.
고현준은 상석에 앉아 손형복의 계획 발표를 들으면서 앞에 놓인 서류를 넘겨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인지 손이 떨려 커피를 서류에 쏟고 말았다.
“대표님?”
법무팀장은 잔뜩 긴장해서 고현준을 쳐다봤다. 혹시 기획에 문제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새 걸로 가져와요.”
고현준은 손에 묻은 커피를 천천히 닦았다.
법무팀장이 자기 서류 주려고 하자 고현준은 시선을 올리고눈을 들어 가장 먼 구석에 있는 안희연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희연 씨, 서류 좀 주시겠어요?”
안희연: “...”
지목된 안희연은 고개를 들었지만 순간 감정을 숨기지 못한 그녀의 얼굴에는 이렇게 씌어있는 듯 했다.
‘고현준, 너 미쳤냐?’
고현준은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증거가 없었다.
을인 그녀가 갑한테 뭐라고 따지겠는가.
“고 대표님은 기억력 진짜 좋으시네요. 아침에 제가 안희연 씨 이름을 잠깐 말했는데 기억하시다니.”
손형복은 아부 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희연을 재촉했다.
“어서 갖다 드리지 않고 뭐해.”
손형복은 안희연 같은 인턴에게 종이 자료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안희연은 을의 입장인 작은 인턴이었기에 갑인 사장에게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일어나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걸어가서 두 손으로 서류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서류를 주고받는 순간,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안희연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고 간지러운 감각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무심코 고현준을 보았지만 남자는 이미 서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조금 전의 접촉은 우연이었고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
안희연은 돌아서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깐.”
이때 고현준이 갑자기 말했다.
안희연: “...”
‘재수 없어!’
“안희연 씨.”
고현준은 서류를 책상에 놓고 특정 페이지의 오른쪽 아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안희연이 돌아보니 그 페이지 오른쪽 아래에는 눈을 흘기는 사람의 그림과 함께 ‘너랑 ㅇㅂㅇ’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안희연: “...”
고 대표님은 인터넷을 잘 하지 않아서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용어를 몰랐다.
안희연은 진심을 담아 웃으며 대답했다.
“ㅇㅂㅇ, 생각하는 이모티콘이에요.”
순간 회의실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모두: “...”
‘뭐야?.
고 대표님께서 이걸 모르겠어?’
법무팀장은 안희연이 서류에 뭘 썼는지 보려고 목을 쭉 뺐지만 안 보여서 엄청 아쉬워했다.
모두 고 대표님이 뭐라고 할지 긴장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외로 고현준은 별말 없었다.
그의 시선은 안희연의 왼손 약지에 머물렀다. 그들이 함께 나눠 꼈던 결혼반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현준 때문에 손형복을 비롯한 로펌 팀과 법무팀 직원들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마치 정말 심심해서 잠시 들른 것처럼 보였다.
안희연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가끔씩 누군가의 뜨겁고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시선을 올리눈을 들어 보면 고현준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역시, 고현준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기에 자신을 쳐다볼 리 없었다.
회의가 끝났다.
고현준은 네이버로 ‘너랑 ㅇㅂㅇ’의 뜻을 검색했다.
너랑 알 바 없음이었다.
“쯧!”
고현준은 어이없어 웃었다
...
“희연 씨, 고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야?”
변호사팀 사무실로 돌아온 주가예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을 물었다.
“아니요.”
안희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주가예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믿지 않았다.
“아까 회의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왜 하필 고 대표님은 희연 씨한테 자료를 달라고 했을까?”
“제가 인턴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제가 자료가 없어도 프로젝트 진행이나 품질에는 영향이 없으니까요.”
안희연은 매우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제가 고 대표님과 아는 사이였다면, 법무팀장이 저를 모를 리 없잖아요?”
모두 수긍했다.
주가예는 만족스럽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희연 씨, ‘글로레’ 알아? 고성 그룹에서 운영하는 명품 주얼리 브랜드인데 탑 여배우들이 광고하려고 엄청 경쟁하는 브랜드지. 근데 고 대표님이 여친한테 선물로 줬대. 그러니까 괜히 헛물켜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