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방우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소유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보아하니 그녀는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한소유의 배경이라면 교무부장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분명히 누군가 중간에서 방해한 것이다.
물론 이런 건 방우혁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지. 네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침을 맞아야 해.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도 언제든 손 뗄 수 있어.”
방우혁이 담담히 말했다.
“알겠어. 나도 최대한 빨리 방법을 찾아서 반을 옮길 테니까.”
한소유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화를 내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네 옆에 앉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쉬는 시간, 방우혁은 화장실에 가려다가 교실 뒷문으로 나섰다.
그러자 바로 문밖에서 키 크고 잘생긴 남학생이 그를 가로막았다.
“친구야, 한소유를 찾는데 좀 불러줄 수 있을까?”
방우혁은 그 남학생을 한번 훑어보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방금 그보다 먼저 몇 명의 학생들이 뒷문으로 나갔는데 이 남학생은 그들에게는 부탁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방우혁을 기다린 것 같았다.
“나는 양지욱이라고 해. 옆 반인데 한소유랑은 옛날부터 아는 사이야.”
양지욱은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 정도로 잘생기고 밝은 미소라면 보통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양지욱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오천 년을 살아온 방우혁이였다.
양지욱이 아무리 잘 숨겼다고 해도 방우혁은 그의 눈에서 악의와 혐오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방우혁은 아무 말 없이 교실로 돌아가 한소유의 어깨를 툭 쳤다.
“뒷문에서 누가 널 찾던데.”
한소유는 어리둥절했지만 결국 일어나 방우혁 뒤를 따라 나왔다.
양지욱을 본 한소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방우혁이 화장실로 가려고 하자 양지욱이 다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방우혁은 눈살을 찌푸리고 양지욱을 쳐다보았다.
“양지욱, 너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한소유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
“네가 전교생 앞에서 이 방우혁이라는 친구랑 같은 책상 쓰겠다고 했다면서? 궁금해서 한번 보러 왔지. 네 새 짝꿍이 어떤지 말이야.”
양지욱은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한소유가 화를 내며 물었다.
양지욱은 한소유의 말은 무시한 채 방우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너무 평범한데? 진짜 너무 평범해서 뭐가 매력인지 전혀 모르겠네.”
그리고 다시 한소유에게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물론 너도 이 친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난 다른 남자가 너랑 너무 가까워지는 게 싫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한소유는 화가 나서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양지욱, 네가 뭔데 참견이야?”
“너한테야 내가 참견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내가 관리할 수 있지.”
양지욱은 방우를 향해 싸늘하게 웃었다.
“곧 수업이니까 가볼게.”
양지욱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떠났다.
양지욱이 가자 방우혁은 표정 없이 한소유를 바라봤다.
“미안해. 양지욱은 미친놈이야. 나랑 아무 관계도 아니고 그냥 계속 쫓아다니는데 내가 여러 번 거절했어...”
방우혁의 시선을 느낀 한소유는 말이 꼬였다.
“됐으니까 빨리 다른 반에 가는 문제나 처리해 줘.”
방우혁은 말하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한소유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할아버지인 한명수는 방우혁과 친해지라고 했지만 방우혁의 이런 성격으로는 소통 자체가 불가능했다.
방우혁이 교실로 돌아오자 반에서 다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주변 학생들은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방우혁은 이제 끝났네. 허동림은 그렇다 쳐도 이번엔 양지욱이잖아? 양씨 가문의 큰 도련님 말이야.”
“그러게. 양지욱의 집안이면 한소유 집안하고 비슷하고 양지욱은 한소유를 엄청 좋아하잖아...”
“근데 또 모르지. 방우혁이 하동민을 그렇게 때려눕히고 아무 일 없었잖아. 어쩌면...”
앞에 앉은 강아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희 설마 방우혁이 진짜로 빽이 있다고 생각하니? 웃기지 마. 방우혁이 무사했던 건 전부 한소유 덕이었어. 이번엔 양지욱이라서 한소유도 못 구할걸?”
“듣는 말에 의하면 양지욱 누나가 엄청나다던데? 양지욱을 진짜로 아낀다더라.”
옆에 있던 허민아도 끼어들었다.
강아림은 구석의 방우혁을 흘깃 보며 비웃었다.
“이제 저 두꺼비 같은 자식이 눈치 있게 먼저 자리를 옮기면 양지욱이 그냥 넘어갈지도 모르지. 아니라면 볼만한 쇼가 펼쳐지겠네.”
방우혁은 민감한 청력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또렷이 들었지만 어린애들과 싸울 마음은 없었다. 다만 한소유의 골칫거리 제조 능력에 대해서만 좀 더 제대로 이해했을 뿐이었다.
한소유와 같은 책상을 쓴 지 겨우 이틀 만에 두 명의 질투 많은 남자를 불러왔다. 반 아이들의 시기와 질투로 비웃음과 조롱이 가득했고 방우혁은 졸지에 유명인이 되었다.
한소유가 지금 반을 옮긴다고 해도 이미 벌어진 상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방우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될 대로 되라지.”
방과 후, 집으로 가려는 방우혁을 보고 한소유가 서둘러 물었다.
“방우혁, 저번에 할아버지께 써준 처방전에 두 가지 약재가 있었는데 아무리 큰 약재상에 물어봐도 없다고 해서...”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야. 희귀한 약재라고 말했잖아. 못 찾으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방우혁은 무심히 말하고 떠났고 한소유는 입을 삐죽이며 책을 정리했다.
방우혁은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그때 길가에 서 있던 트럭 운전석에서 어제 교무실에서 방우혁에게 발길질당한 박대한이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개자식, 드디어 나왔구나.”
박대한은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형님,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알았어. 계획대로 진행시켜. 흔적도 없이 처리해 버려.”
하문성이 독살스럽게 말했다.
방우혁이 횡단보도를 지날 때 트럭이 급속도로 달려들었다.
“위험해. 빨리 도망가!”
뒤에서 교사 복장의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쾅!”
귀를 찢는 듯한 금속 충돌음이 여교사의 비명을 삼켜버렸다.
거센 바람과 함께 트럭이 지나가자 그녀의 긴 머리가 엉망으로 흩날렸다.
눈앞에는 이미 수 미터를 질주해 가며 도로에 까만 타이어 자국을 남긴 대형 트럭이 멈춰 있었고 여교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 자신이 바로 옆에서 목격한 건 분명히 강해고등학교 학생이 트럭에 치여 죽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완전히 새하얘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트럭의 뒷바퀴 네 개가 바닥을 긁으며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렇게나 무지막지하게 달리던 트럭이 지금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럭의 앞부분 범퍼 중앙에는 선명하게 움푹 팬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박대한은 충돌의 충격으로 이마가 터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는 패닉 상태로 핸들을 마구잡이로 돌리고 엑셀을 밟아댔다.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의 계획은 간단했다. 방우혁을 깔아뭉개고 그대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트럭이 부딪친 순간, 그 감각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강철판에 박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강철판이... 아니 방우혁이 트럭을 제자리에 붙들어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