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애초의 설렘처럼
강찬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리고 흐릿한 불빛 아래 안색이 섬뜩하게 변해갔다.
“죽고 싶어 성시연?”
물론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겠지. 그해 성시연의 엄마가 그녀를 데리고 강씨 가문에 들어올 때, 처음 오빠라고 불렀지만 강찬우가 매정하게 쏘아붙였다.
“너도 너희 엄마랑 똑같아. 역겨워 정말!”
고요한 정적 속에 흐르던 애틋한 분위기는 순간 화약 냄새로 변해갔다. 성시연은 꽉 잡힌 손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그때 강찬우가 드디어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놓아주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나갔다.
온 세상이 조용해졌고 성시연은 넋 나간 인형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의 고통은 영원히 마음의 고통을 따라갈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먼지 속에 묻혀있는 법이다. 이토록 초라한 출발점에서 끝이 안 보이는 어두컴컴한 터널을 헤매며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고통의 연장선일 따름이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에 들어가서 온몸을 뒤덮은 피로함을 깨끗이 씻었다.
그해 성시연의 엄마는 불치병을 앓고 있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니 하는 수 없이 그녀를 강씨 가문에 데려갔다. 아빠란 인간은 애초에 두 모녀를 나 몰라라 했고 이에 엄마가 마지못해 소꿉친구인 강준석을 찾아갔는데 이 일로 강찬우의 부모가 이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찬우의 엄마는 고작 8살 된 강찬우를 매정하게 버리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듬해, 성시연의 엄마가 병으로 사망했고 잇달아 강찬우의 엄마도 타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강찬우는 엄마의 임종도 못 지켜드렸다.
그는 이 모든 책임을 성시연 모녀에게 돌렸다. 돌봐줄 사람 하나 없던 성시연은 결국 고아가 되어 강씨 가문에 맡겨져야만 했고 어언간 1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3년 전 강준석이 사망하고 강찬우가 출국했지만 이 모든 것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성시연은 침대 밑에서 장부를 꺼내더니 웅크리고 앉아서 꼼꼼하게 살펴봤다. 3년 전 강찬우가 출국하면서 그녀는 모든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무릇 돈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고 이 3년 동안 적금한 돈을 일일이 장부에 적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2천만 원만 더 모으면 그동안 강씨 가문에서 키워준 은혜를, 그녀에게 들인 돈을 전부 갚을 수 있다.
돈 말고 다른 방면으론 강씨 가문이나 강찬우에게 빚진 걸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그녀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이 집을 떠난 후 새 출발 하기로 다짐했다.
이 또한 강찬우에게도 해탈이겠지, 그녀 본인에게도 해탈인 것처럼... 최소한 그녀가 사라지면 강찬우는 안일한 삶을 살 수가 있으니까.
다음날.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성시연은 부랴부랴 세안을 마치고 아침 준비를 했다.
강찬우가 출국한 뒤 강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전부 해고됐고 이 3년 동안 줄곧 그녀 홀로 커다란 강씨 저택을 지켜왔다. 이제 강찬우가 돌아왔으니 어서 그에게 아침상을 차려줘야 한다.
한바탕 분주하게 돌아치고 테이블 세팅까지 마쳤지만 강찬우는 좀처럼 아래층에 내려오질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이 남자가 금방 귀국해서 시차 적응이 안 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점점 식어가는 아침밥을 바라보며 그녀는 드디어 용기 내어 위층에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아침상 다 차려놨어요.”
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눈 딱 감고 한 번 더 노크했고 이번엔 드디어 피드백이 돌아왔다.
“꺼져!”
악랄한 그의 태도에 진작 적응한 성시연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주방에 돌아가 밥을 먹었다. 머릿속엔 온통 주말에 병원 휴가 때 무슨 알바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이때 갑자기 계단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선을 올리자 강찬우가 잠이 덜 깬 듯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 외출하려는 참인지 깔끔한 블랙 슈트를 차려입고 머리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조각 같은 그의 외모는 볼 때마다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이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 섞인 표정을 지어도 그녀에겐 모두 완벽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강찬우 덕분에 그녀는 ‘남자는 정장을 입을 때 제일 멋지다’는 말을 믿게 됐다. 3년 만에 다시 만났지만 여전히 가슴 설렐 따름이었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면 하기 위해 그녀가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출근해야 해요. 더 늦으면 지각이에요. 다 먹고 그냥 놔둬요. 내가 와서 치울게요.”
이때 문득 잘 정리되지 못한 그의 넥타이를 보더니 습관처럼 앞으로 다가가 단정하게 매주었다. 강찬우는 그런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바짝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