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가 돌아왔다
“아이 지워!”
성시연이 병원 복도를 지나갈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찬우?’
이 남자가 3년 만에 드디어 돌아온 걸까?
그녀는 숨을 머금고 무언가에 홀린 듯 걸음을 멈췄다. 몰래 엿듣다 보니 마음이 살짝 찔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한 여자가 흐느끼며 말했다.
“이 아이 낳고 싶단 말이에요... 제발요... 흑흑...”
“아이는 나중에 또 생길 거야.”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애원을 단호하게 거절했고 위로의 뜻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왔을뿐더러 임신한 여자까지 데려오다니...
성시연은 심장이 바짝 조여와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
자리에 앉은 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익숙한 그 번호를 찾아냈지만 차마 걸어볼 용기가 안 났다.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왔다는 건 아마도 일부러 그런 거겠지...
“선생님, 퇴근 안 하세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강찬우가 돌아온 이상 무조건 강씨 저택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와 만남을 피하고자 성시연은 일부러 병원에서 밤늦게까지 있다가 집에 돌아갔다.
성시연과 강찬우는 같은 지붕 아래에 19년 동안 함께 살아온 ‘낯선 사이’이다.
‘낯선 사이’란 두 사람이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부부도 아니란 뜻이다.
그녀가 18살 되던 해, 몰래 강찬우의 초상화를 그렸고 또한 그에 관한 일기를 썼는데 이를 발견한 강찬우가 극도로 혐오에 찬 표정을 지었었다. 그 표정은 아직도 성시연의 머릿속에 생생하다. 결국 강찬우를 짝사랑해온 그녀의 마음이 모든 이에게 까발려지고 정작 장본인인 강찬우는 이 마음을 매정하게 저버리며 제멋대로 짓밟아버렸다.
성시연이 5살 때 강씨 가문에 들어오면서부터 강찬우는 그녀를 극도로 미워했다. 그녀는 강찬우의 사랑 따위 바랄 엄두도 안 났다. 오히려 그를 짝사랑하는 이 마음만 우스운 꼴이 돼버렸다.
집안에 들어올 때 성시연은 불을 켜지 않았다. 강씨 저택에서 19년을 살면서 그녀는 이미 이 집 안 구석구석을 너무 잘 안다.
침실 문 앞에 도착해 이제 막 문손잡이를 잡았는데 뒤에서 별안간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익숙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 안았고 짙은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가운 키스는 그녀의 입술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려 갔다...
성시연은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늘 무장해제된다. 특히 오늘은 3년 만의 만남이라 이제 막 빠져들려고 하는데 문득 낮에 있은 일이 생각났다. 그가 임신한 여자를 병원에 데려왔으니 성시연도 이제 더는 저 자신을 경멸하고 짓밟을 순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용기 내어 강찬우를 밀치고 재빨리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취했어요. 찬우 씨.”
강찬우는 그녀의 턱을 확 잡고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
“맨정신에 어떻게 너랑 잘 생각을 하겠어? 애초에 너도 나랑 자고 싶었던 거 아니야? 왜? 3년 못 봤다고 이제 와서 고고한 척이야?”
성시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독설을 퍼붓는 강찬우의 모습에 진작 적응했다. 지난 시간 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고 심지어 침대에서까지 그는 성시연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을 무수히 해왔다.
그녀의 침묵에 강찬우는 더욱 화가 차올랐다. 그는 성시연의 턱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내가 귀국한 걸 알면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성시연은 시선을 내리고 너무 아픈 모양인지 목소리까지 살짝 떨렸다.
“나한테 아무 말 없었잖아요.”
강찬우가 바짝 다가갔다.
“모두가 다 아는데 네가 모를 리 있어?”
‘그러게, 병원에서 우연히 임산부랑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됐고 나중엔 또 뉴스로 확인하게 됐지. 모두가 다 아는 일을 나만 맨 마지막에 알게 된 거잖아. 그것도 그토록 뜻밖인 장소에서. 난 찬우 씨가 더는 날 안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요.’
강찬우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기 귀찮았던지 강제로 끌어안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깔아 눕혔다. 그러고는 전희도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성시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그의 가슴을 밀쳤다.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