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다 씻고 내 방으로 와
그러니까 두 사람이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었던 건데 정작 내뱉고 보니 너무 예를 갖춘 격이 되었다. 재치있는 사람은 결코 너무 뻔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성시연도 그가 뭘 묻는지 바로 알아챘다.
“응, 많이 친해.”
그녀는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 더 많은 설명은 없었다. 왜냐하면 본인조차도 강찬우와의 관계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그녀는 진현수에게 어떻게 강찬우를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강현에서 강찬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그녀가 말을 아끼자 진현수도 더 캐묻지 않았다.
강씨 저택 입구에 도착한 후 성시연은 차에서 내려 진현수와 진시연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주말에 만나.”
진시연은 차창에 엎드려 강씨 저택을 유심히 살펴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왜 알바하며 돈 벌어요? 선생님 대체 얼마나 사정이 딱한 거예요?”
성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맞아, 선생님 사정이 너무 딱해. 돈을 못 벌면 끼니도 걸러야 해. 어서 돌아가, 운전 조심하고. 빠이빠이.”
진현수의 차가 멀어진 후에야 성시연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강찬우는 아직이었다. 분명 그녀보다 한참 전에 떠났는데 설마 다른 데로 간 걸까?
성시연은 더 생각하지 않고 불을 환하게 켰다. 따스한 불빛이 적막감을 조금 달래주는 듯싶었다. 이제 막 위층에 올라가려는데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찬우 씨 돌아왔네...’
진현수가 떠난 지 얼마 안 됐으니 분명 그의 차와 마주쳤을 것이다.
성시연은 주방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그를 외면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속옷을 챙겨서 욕실에 들어간 후 씻으려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물이 서서히 차오르고 핑크색 거품이 점점 풍성해졌다. 이 과정을 지켜보는 건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다. 적어도 적막감을 해소할 수 있고 긴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니까.
물을 다 받고 욕조에 들어가 머리를 텅 비우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막 스르륵 잠들려고 할 때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강찬우의 짙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순간 머리가 살짝 정지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강찬우는 무표정하게 문 앞에 서 있을 뿐 떠나지도 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잠시 침묵한 후 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 씻고 내 방으로 와.”
그러고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홱 떠나가 버렸다.
오해하기에 십상인 말 때문에 성시연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술을 안 마시고 맨정신인 걸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도 욕조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방 문 앞에 다가오니 문이 살짝 열린 상태였다. 다만 그녀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형식적으로 노크했다.
“저 왔어요. 무슨 일이에요?”
통유리창 앞에 앉아있는 강찬우는 어두컴컴한 창밖에 뭐가 있는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걸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아니라면 이 어둠에 가려진 수많은 요소들도 보아낼 수 없을 것이다.
“너희 엄마 물건들 다 가져가.”
그는 탁자 위의 박달나무 상자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그 상자는 낡아서 색바래지고 부피가 그리 크지 않았다.
상자를 본 성시연은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그녀는 얼른 다가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이건 그녀 엄마의 유품이다. 어릴 때 엄마가 그녀를 데리고 사방을 헤맬 때 항상 이 상자를 들고 다녔다. 이 안에는 분명 엄마에게 매우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해 엄마가 돌아가신 후 상자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참을 찾아도 안 보이길래 엄마와 함께 무덤에 묻은 줄 알았는데 강찬우의 손에 있을 줄이야.
성시연은 그가 왜 이제야 내놓았는지 질책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을 다시 얻은 것만으로도 너무 큰 기쁨과 위로가 됐으니까.
성시연은 보물을 다루듯 상자를 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강찬우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꾹 참으며 말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