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그럴 필요 없어
성시연은 온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 일은 오직 세 사람만 알고 있다. 그녀와 진현수, 그리고 그녀의 절친 이연아까지…. 하수현이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거냐고?!
강찬우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꽂혀 있었고 이에 성시연도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한 채 애써 담담한 척하며 되물었다.
“오지랖도 넓으시네요. 누가 알려줬어요?”
하수현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답했다.
“몰라, 까먹었어. 시간이 너무 오래됐잖아. 그때 너희 학교에서 강의할 때 우연히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네가 방금 대학 동기라고 해서 나도 생각난 거야. 쟤 한때 너한테 대시했었지?”
성시연은 일부러 홀가분한 척,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말했다.
“그래요? 뭐 다 지나간 일이죠 이젠. 현수 참 좋은 애예요. 제가 가당키나 할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강찬우를 살펴봤는데 이 남자의 안색이 섬뜩하리만큼 어둡게 변해갔다. 싸늘한 눈빛은 마치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기세였다.
“얻지 못할 때야 여신이고 애틋해 죽겠지, 일단 자고 나면 바로 질려버릴지도 몰라.”
강찬우가 무심코 내던진 말에 성시연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 알아, 안다고. 찬우 씨든 현수든 다 내가 넘볼 만한 남자가 아니란 거 너무 잘 알아. 이렇게 일부러 콕 집어서 말해줄 필요는 없어.”
그녀는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 머리를 푹 숙이고 감정을 숨기려고 했다.
하수현은 본인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진 걸 눈치채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는 성시연의 앞접시에 음식을 한 점 집어주었다.
“이거 맛있어. 이 집 메인 요리야.”
이에 강찬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걔 손 있어.”
하수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음식 한 점 집어준 것 같고 질투라도 하게?”
강찬우가 언짢은 눈길로 그를 째려봤다.
“그럴 리가. 얼른 먹기나 해.”
성시연은 결국 음식을 얼마 먹지도 못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분위기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고 또 어쩌면 잔잔함 속에 거센 파도가 숨은 듯했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후 하수현이 먼저 차를 타고 떠나갔고 성시연은 선뜻 강찬우에게 말했다.
“저는 택시 타고 갈게요. 찬우 씨도 운전 조심해요.”
강찬우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타더니 그녀 앞에서 쌩하고 떠나가 버렸다. 결국 그는 어둠 속으로 종적을 감췄다.
성시연도 딱히 외롭거나 쓸쓸하진 않았다. 어차피 지난 수년간 늘 이래왔으니까. 같은 방향이라도 이 남자는 단 한 번도 차에 실어준 적이 없다. 그는 성시연만 보면 미치도록 역겹다고 한다. 수년간 그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아무 소용 없는 노릇이었다.
수많은 애틋한 추억을 되새겨보노라면 어느 한 번 강찬우가 맑은 정신인 적이 없었다. 항상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굴 뿐이다. 그의 말처럼 맨정신에 성시연과 잠자리를 가질 리가 있을까?
길옆에서 십 분 정도 기다렸지만 빈 차는 없었다. 성시연은 더 기다리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봄날의 밤바람은 약간 싸늘하게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이 가슴에 스며들었지만 우울한 그녀의 마음을 걷어가진 못했다.
띠...
한참 걸은 후 차 한 대가 불쑥 옆에 세워지더니 경적을 울렸다. 고개를 돌리고 힐긋 바라보자 열린 차창으로 진현수가 보란 듯이 나타났다.
“왜 혼자 집에 가? 내가 바래다줄까?”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 아니야. 그냥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산책도 할 겸.”
이때 진시연이 뒷좌석에서 얼굴을 쏙 내밀었다.
“왜 자꾸 거절해요? 우리 오빠 원래 이런 좋은 사람이에요! 부담 갖지 말고 얼른 타요.”
성시연은 마지못해 쓴웃음을 지었다.
“부담 안 가져.”
진현수도 피식 웃었다.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선생님 태워드려.”
성시연은 결국 호의를 거절하지 못한 채 차에 올라탔다.
처음엔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고 진시연만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강씨 저택에 거의 도착할 때 진현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너 강씨 저택에 살아? 아까는 또 강찬우 씨랑 함께 식사도 하던데... 두 사람 아주 친한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