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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박시훈이 차를 몰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려 막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할 때, 서윤아가 주머니에서 박시훈의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오빠 핸드폰 내가 챙겼어.” 박시훈이 짧게 대꾸하고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곧 공기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서윤아는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왜 그래?” 박시훈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밥 같이 못 먹을 거 같아. 오늘은 너 먼저 가서 먹어. 다음에 같이 먹자, 응?” 가라앉는 마음이 저 깊숙이 떨어졌다. 서윤아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말했다. “중요한 일이야? 다음에 가면 안 돼?” “응, 엄청 중요한 일이야.” 그렇게 말한 박시훈은 죄책감 때문인지 다정하게 서윤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윤아야, 다음에 꼭 같이 먹자.” 그렇게 말 한마디 남기고 그는 곧장 몸을 돌렸다. 서윤아는 멀어지는 박시훈의 뒷모습을 보며 점점 더, 찾을 수 없는 곳까지 가라앉는 심장을 느꼈다. 그날 오후, 아니나 다를까 고민지의 SNS 피드에 음식 사진과 놀이공원 사진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중엔 어떤 남자의 손이 찍힌 사진이 있었다. 서윤아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언젠가 몇 번이고 제 얼굴을 쓰다듬고, 몇 번이고 자신을 꼭 끌어안고, 또 몇 번이고 자신과 깍지를 낀 그 손. 그리고 이젠 다른 여자의 SNS에 나타난 그 손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8년을 사랑한 자신의 남자 친구가, 자신과의 데이트를 거절하고 다른 여자와 놀이동산에 놀러 갔다는 걸. 방 안에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윤아가 눈을 꼭 감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밤늦게까지 박시훈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윤아는 계속 박시훈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돌아온 건 그가 아닌 그의 친구인 허경태의 전화였다. “윤아야, 시훈이 지금 서킷에서 목숨 걸고 레이스 하려 한다. 네가 와서 좀 말려봐.” 그 다급한 목소리에 서윤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밖을 나섰다. 예전에 박시훈은 레이싱을 즐겨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귀고 나선 다시는 그런 위험한 놀이는 하지 않겠다고 그녀와 약속했었다. 서윤아는 최대한 빨리 서킷에 도착한 셈이었지만, 이미 늦었는지 박시훈은 이미 트랙에 올라섰다. 그리고 관중들 사이에는 고민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서윤아가 누군가를 잡아채며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시훈 오빠가 갑자기 레이싱을 하게 된 거예요?” 허경태가 고민지를 흘깃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고민지가 울먹이며 말했다. “다 제 탓이에요. 제가 괜히 서킷 구경을 하고 싶다고 졸라서. 시훈 오빠가 절 데리고 와줬는데, 어떤 남자가 자꾸 같이 놀자고 치근대다가 시훈 오빠가 안 된다고 하니까 갑자기 시합을 한다고…” 그제야 서윤아가 상황을 파악했다. 고민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막기 위해서, 자신과 했던 약속마저 잊어버린 거였다. 서윤아가 트랙 위 눈에 익은 레이싱카를 쳐다봤다. 그 차에서 울리는 익숙한 엔진 소리를 들으니 8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녀는 바로 여기서, 완전히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날 박시훈이 이곳 서킷에 서윤아를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서윤아, 만약 다음 시합에서 내가 상대보다 두 바퀴 더 빨리 들어오면, 넌 나랑 사귀는 거야.” 서윤아는 그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박시훈은 목숨이라도 내던질 것처럼 질주했고, 마지막 스퍼트를 내며 내기에서 이겼다. 하지만 결국 차가 뒤집히며 크게 다쳤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사고였다. 그날 박시훈은 온몸에 상처를 달고 병원 침대에 누워 서윤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이겼으니까, 이제 우리 사귀는 거야.” 박시훈은 서윤아를 위해 목숨마저 내걸었다. 서윤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 한 가지는 선명하게 그녀의 뇌리에 떠올랐다. 평생 이 사람밖에 없다고. 냉소적이고 매사 담담한 서윤아였기에, 불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이어야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박시훈은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걸 정도로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박시훈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걸 줄은. “박시훈! 너 진짜 미쳤냐! 거기서 가속을 한다고?” 옆에 있던 허경태가 소리치자 서윤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고개를 든 그녀의 시야에 속도를 줄이지 않는 레이싱카가 그대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그대로 펜스에 처박히는 게 보였다. 쾅—— 박시훈의 레이싱카가 몇 미터를 나뒹굴었고, 놀란 고민지가 찢어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윤아에겐 8년 전 사고로 다친 박시훈이 다시 보이는 듯했다. …… 병원으로 이송된 박시훈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의 왼쪽 다리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고, 서윤아의 옷에는 그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서윤아는 박시훈을 손을 놓치지 않고, 그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두 시간의 수술 끝에 박시훈은 고비를 넘기고 병실로 옮겨졌다. 서윤아는 밤새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박시훈의 곁을 지켰다. 다음 날, 허경태는 그녀의 지친 모습과 피에 젖은 옷에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고아한 자태를 유지하던 서윤아가 이렇게 엉망이 되다니. “윤아야, 가서 좀 쉬어. 옷도 좀 갈아입고.” 서윤아는 옷에 묻은 굳은 피를 내려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힘없이 몸을 일으켜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어서 그냥 간호사에게서 깨끗한 옷을 빌려 샤워를 한 뒤 곧바로 병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병실 안에서 허경태가 성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너 어제 어떻게 된 거야? 고민지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 박시훈, 시치미 떼지 말고 똑바로 말해. 고민지랑 무슨 사이야?” 서윤아가 저도 모르게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하지만 박시훈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허경태가 계속해서 박시훈을 다그쳤다. “너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하는 건 서윤아라며. 근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번엔 박시훈이 허약하고 조금은 쉰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비수가 되어 서윤아의 심장을 후벼팠다. “8년이나 됐잖아. 질렸어.” 서윤아가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몸이 차가워졌다. 질렸다는 세 글자가 망치처럼 그녀의 머리를 때리고 간 듯 어지럽게 흩어졌다. 어쩌면, 그녀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박시훈에게 따져야 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는 울고불며하며 들어가 온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야 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20살의 서윤아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28살의 서윤아였고,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박시훈이 자신에게 질린 이유일지도 몰랐다. 온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총 맞은 사람처럼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몸을 돌려 병실을 떠났다. 그렇게 혼자서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언젠가 서윤아는 박시훈의 냉담한 태도에 온갖 이유를 붙였다. 그가 차가워진 건 불같은 사랑이 온건한 사랑으로 변한 거라고, 유독 고민지를 챙기는 건 오빠로서라고… 하지만 이제 알았다. 더는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박시훈같이 뜨거운 남자의 사랑은, 영원히 따듯한 불씨로 잦아들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은 언제나 불처럼 타올랐고, 더는 태울 것이 남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붙을 뿐이었다. 서윤아가 아닌, 그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여자에게로. 그래서… 점점 냉담해진 태도는 질려서였다. 결혼 생각이 없던 건 질려서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도 질려서였다. 그렇게 미친 듯이 자신을 쫓아다니고, 8년을 손에 쥐고 있다가, 이젠 질린 거다. 먼저 사랑한 것도 그였고, 먼저 사랑을 그만둔 것도 그였다. ‘서윤아, 너 8년을 놀아난 거야. 진짜 우습다.’ 집으로 돌아간 서윤아는 곧바로 캐리어를 꺼내 짐을 쌌다. 이 집에서 8년을 함께 살았고, 그만큼 쌓인 물건들은 캐리어를 몇 개나 가져와도 다 들어가질 않았다. 그래서 서윤아는 그냥 전부 버렸다. 짐을 마구잡이로 넣은 캐리어를 전부 쓰레기장에 던져버렸다. 꼭 우스웠던 자신의 8년을 버리고 싶은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찢길 듯 아픈 심장에도, 더는 이 아슬아슬한 평화를 이어갈 자신이 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 집에서 제 흔적을 전부 지웠다. 그리고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박시훈에게 문자 하나를 보내고, 열쇠를 집에 남겨둔 채 문을 닫았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하늘은 그녀의 마음처럼 우중충했다. 그녀는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거닐었다. 목적지도 없었기에 택시도 부르지 않았다. 얼마나 정처 없이 걸었을까,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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