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최근 두 사람 사이는 계속 찬 바람이 불었고, 예전에도 이런 때엔 박시훈이 서프라이즈를 준비해 화해를 하곤 했다.
서윤아는 비서를 흘깃 보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럴지도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박시훈이 서윤아 옆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늘 서윤아가 서운했을 걸 알았는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엄마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서윤아도 냉랭한 분위기를 이어 나갈 마음이 사라져,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럼 우리 앞으로 결혼 문제는 뭐라고 얘기해?”
그녀가 먼저 기대오자 박시훈도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해결할게, 넌 걱정하지 마.”
……
서윤아는 무도회 일을 듣고 원래 스케줄을 조정했다. 심지어는 대회 일정을 뒤로 미루기까지 했다.
하지만 파티 당일이 될 때까지 박시훈은 그녀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
서윤아는 정장을 차려입고 나가는 박시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겉옷을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파티장 로비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회사 대표이니만큼 박시훈은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춤을 춰야 했다. 그리고 서윤아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파티장 중앙에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고민지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박시훈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저 하늘색 드레스는,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시켰던 그 드레스는, 서윤아가 아닌 고민지를 위한 거였다.
박시훈이 파트너로 원한 이는 서윤아가 아닌, 고민지였다.
춤이 끝나고 스포트라이트가 두 사람에게 쏟아졌고 주변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아무도 문 쪽에 서 있는 서윤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박시훈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고민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깊은 눈동자 아래에는 어떤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고민지의 귓가가 발그레 해졌다. 그녀는 돌연 박시훈에게 말했다.
“시훈 오빠, 굿바이 키스 겸 볼에 입 맞춰도 돼?”
박시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허락의 의미였다.
고민지가 용기를 내어 발꿈치를 들어 올렸고, 그녀의 입술이 박시훈의 뺨에 닿기 직전, 박시훈의 시선이 무대 아래에 있는 서윤아에게 닿았다.
그 순간 박시훈은 몸이 굳었고, 곧 무의식적으로 고민지를 밀쳐냈다.
서윤아는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 곧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막 호텔을 나섰을 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박시훈이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붙잡았다.
“윤아야!”
“이거 놔.”
하지만 서윤아는 차갑게 그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서운한 일이 있어도 울고불고 소리치는 대신, 이렇게 차가운 낯을 꾸며내며 자신이 상처받은 걸 숨겼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의지할 사람이 없던 서윤아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길 꺼려했다.
아무리 아파도 내색하지 않고, 이를 악물며 견뎌냈다. 그리고 주변에서 자신이 무너지길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절대 약해 보이지 않으려 했다.
예전에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박시훈은 그녀가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짐심으로 냉랭한 눈빛을 보내오자 그는 내심 당황했다.
“내 말 좀 들어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민지 인턴 기간이 곧 끝나. 그런데 내가 인턴십 결과가 우수하면 그녀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그 부탁이 이번 파티에서 내 파트너로 참석하고 싶다는 거였어.
게다가 너 요즘 계속 바빴으니까, 네가 피곤할까 봐 말 안 꺼낸 거였어. 그리고 방금 그건, 어떻게 혼을 내야 하나 싶어서 잠깐 고민하고 있던 거였어.”
박시훈이 변명을 쏟아내는데 고민지가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윤아에게 말했다.
“언니, 죄송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서, 볼키스는 인사 같은 거라, 시훈 오빠랑 작별 인사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 화내지 마세요."
고민지가 불쌍한 낯으로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것 마냥 서럽게 울고 있었다.
서윤아는 모든 게 피곤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지는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윤아는 어린 여자애랑 더 이상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박시훈의 변명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번에 박시훈은 서윤아를 달래고 나서도 고민지와 거리를 두고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수혁이 도착했다. 그는 상황을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서윤아를 흘깃 보고 고민지를 억지로 데리고 자리를 떴을 뿐이었다.
그 일 이후 고민지는 일부러 박시훈을 피하는 듯 인턴십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퇴사를 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민지가 회사를 그만두는 날, 박시훈은 밤늦게 집에 들어와 서윤아에게 말했다.
“민지가 인턴 기간 끝나기도 전에 그만 뒀어.”
그 말투는 담담했지만, 서윤아는 왠지 그가 자신을 탓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괜한 일로 고민지를 쫓아냈다는 듯 말이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는 더욱 소원해졌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는데,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박시훈은 점점 냉담해졌고, 둘은 같은 침대에 누워도 등 돌리고 자는 날이 많아졌다.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던 일도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박시훈이 유독 늦게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그날따라 그의 기분은 무척 좋아 보였고, 냉담했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박시훈이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을 때 테이블 위에 둔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윤아는 급한 일인 줄 알고 욕실로 가져다주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휴대폰 화면을 본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고민지에게 온 문자였다.
[시훈 오빠, 저번 주 학교 파티에 같이 가줘서 고마웠어.]
[오늘 같이 밥 먹기로 했잖아! 빨리 나와!]
[오늘 놀이공원 안 갈래?]
서윤아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조용히 둘의 대화 창을 열었다. 지난주 목요일, 박시훈이 늦게 귀가한 날, 그날이 바로 고민지와 파티에 다녀온 날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기분이 좋아진 이유가, 전부 고민지 때문이었던 건가?
서윤아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욕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렴풋이 물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마음은 텅 빈 것처럼 공허해졌다.
박시훈이 샤워를 마치고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서윤아는 멍하니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왜 그래?”
박시훈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에 서윤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시간 어때? 같이 밥 먹은 지도 오래된 거 같은데, 시간 괜찮으면 오늘 데이트할래?”
박시훈도 자신이 최근 그녀에게 냉랭했던 게 신경 쓰였는지 미간을 꾹꾹 누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레스토랑 예약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