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서윤아는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주말, 박시훈의 친구가 곧 결혼한다고 그 전에 베첼러 파티를 연다고 해서 서윤아는 박시훈과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파티룸에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심지어 고민지도 있었다.
박시훈은 고민지를 보자마자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가 여긴 왜 왔어?”
청순한 분위기의 고민지는 확실히 이곳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오빠가 외국에 나가 있으니까 내가 대신 축하 선물 주려고 왔지.”
그제야 박시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더니, 몇 번이고 고민지에게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했다.
그리고 그 뒤에야 서윤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서윤아는 그런 박시훈의 모습에 다시금 불편해진 마음을 꾹 참았다.
그때 파티의 주인공이 룸으로 들어왔고, 다들 그에게 다가가 축하를 건넸다. 그 약간의 소란에 서윤아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갔다.
한창 모두가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누군가 말했다.
“이 자식이 먼저 결혼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러니까. 난 시훈이랑 윤아가 먼저 결혼할 줄 알았어.”
“맞아. 거의 8년을 사귀었는데, 슬슬 결혼할 때 됐지.”
그 말에 서윤아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박시훈을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차분한 얼굴로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결혼 얘기는 두 사람 사이의 금기였다.
서윤아는 예전에 그에게 3번이나 결혼 얘기를 꺼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25살이 되면서 서윤아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점점 커졌는데 박시훈이 결혼 얘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아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처음엔 그녀가 26살 생일 때, 박지훈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더 기다리자고 했다.
두 번째는 그가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난 뒤, 최근 회사 바쁘다며 일이 한가해지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세 번째는 반년 전, 박시훈은 자신이 비혼주의라며, 그는 그녀를 너무 사랑하지만,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둘 사이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그러니 계속 이렇게 지내자고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그렇게 그에게 맞추다 보니 어느새 28살이 되었다.
서윤아는 이 화제를 피하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디저트를 가지러 갔다.
테이블에 기대 디저트를 한입 베어 무는데 어떤 키가 크고 준수하게 생긴 남자가 다가왔다.
서윤아를 보는 그 남자의 눈빛에는 어떤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서윤아는 미의 기준을 토대로 빚은 것처럼 수려한 외모를 가졌다. 매력적인 이목구비와 냉랭한 분위기가 남자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저기, 혹시 그쪽 번호 좀 줄 수 있어요?”
남자가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서윤아는 그런 남자를 흘깃 쳐다봤다.
이쪽 바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녀와 박시훈의 사이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서윤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옆에 있던 박시훈의 친구들 몇이 그를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인마, 너 진심이야?”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은 남자가 벙찐 얼굴을 했다.
박시훈의 친구들은 재밌다는 듯 낄낄 웃으며 남자를 박시훈에게 데려갔다.
“시훈아, 얘가 방금 서윤아한테 번호 물어보더라. 어떻게 생각해?”
놀리듯 말하는 그 말에 남자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이 하얘졌다. 그에 서윤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박시훈은 집착만큼 독점욕이 강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서윤아의 곁에 다른 이성이 있는 걸 조금도 용납하지 못했다.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그녀에게 고백했을 때, 박시훈이 그대로 그 남자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한 적도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이번에도 그런 장면을 기대한 듯했다.
그래서 서윤아가 박시훈을 달래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박시훈의 표정은 불쾌함은 커녕 무척 담담해 보였다.
그는 냉랭한 눈으로 남자를 흘깃 보고는 손을 올리기는 커녕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에 서윤아가 멈칫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박시훈의 시선이 룸 한쪽에 있는 고민지에게 향했고,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는 걸 봤다.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박시훈은 벌떡 몸을 일으켜 고민지에게 향했다.
“저기요, 그쪽이 진짜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번호 좀…”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시훈이 그를 발로 걷어찼다.
“퍽”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는 그대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파티룸이 정적에 휩싸였고, 놀란 시선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박시환이 굳은 얼굴로 고민지를 보호하듯 뒤로 숨기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으르렁댔다.
“죽고 싶어?”
박시훈은 태권도 검은띠였고, 손속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는 한 대로는 성에 안 찼는지 바닥을 나뒹구는 남자를 향해 죽일 듯한 기세로 다가갔다.
순식간에 파티룸은 난장판이 됐다.
싸우는 소리에 그를 말리는 소리,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고민지는 놀라서 구석에 웅크리고 울먹였다.
“시훈 오빠, 나 무서워…”
그리고 그 순간 박시훈을 말리고 있던 서윤아는 자신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던 박시훈이 흠칫한 걸 느꼈다.
곧바로 발길질을 멈춘 박시훈은 눈이 붉어진 고민지를 보고 그를 말리던 사람들을 제치고 울먹이는 고민지에게 다가가 그녀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오빠랑 여기서 나가자.”
그는 고민지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며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옆에 있던 서윤아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서윤아는 그 자리에 굳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남자를 무자비하게 때리던 박시훈과, 고민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끄는 박시훈이 반복해서 떠오르며 그녀를 괴롭혔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서윤아도 더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밖은 언제부터인가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며 서윤아는 수년이 지난 그 비 오는 날이 떠올랐다.
이혼한 부모님이 그녀를 위해 시간을 내 함께 놀러 나갔던 날이었다. 그날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그녀는 혼자 남았다.
그날 이후 서윤아에게 비와 차는 트라우마였다.
심지어 운전을 배울 엄두도 나지 않아 계속 택시를 타고 다녔다.
물론 택시가 안 잡힐 때도 종종 있었지만, 박시훈을 만나고 나선 그녀가 어디를 가든 그나 차를 몰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는 그녀에게 가장 의지 되는 안식처였다.
서윤아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경적 소리가 들리더니 마이바흐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 안에서 수려한 남자가 우산을 들고 내리더니 서윤아 앞에 섰다.
“서윤아? 왜 혼자 여기 있어?”
그 목소리에 서윤아가 고개를 들고 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고민지의 오빠, 고수혁이었다.
‘언제 귀국한 거지?’
그런 의문도 잠시, 서윤아는 그가 고민지의 일을 듣고 온 거라고 생각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고민지 씨는 괜찮아요. 방금 시훈 오빠가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그 말에 고수혁은 되려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더니 고민지 일은 묻지도 않고 빨갛게 부은 서윤아의 발목을 보고 물었다.
“다쳤어?”
서윤아는 그제야 제 상처를 알아차렸다. 아마 방금 박시훈을 말리다 생긴 것 같았다.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도 고수혁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더니 우산을 버려두고 서윤아의 허리를 감싸안아 들었다. 놀란 서윤아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고수혁이 그녀를 차에 앉히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면봉과 약이 들려 있었다.
고수혁은 여전히 굳은 낯으로 서윤아의 신발을 벗기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발목에 약을 발랐다.
알싸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서윤아가 발을 뺐지만 고수혁이 곧바로 그녀의 발을 잡아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사실 서윤아와 고수혁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고수혁은 박시훈의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고고한 스타일이었고, 누구에게나 차갑게 대했다.
심지어 대학 시절 서윤아는 박시훈보다 고수혁을 먼저 알았다. 둘은 같은 동아리에 가입했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짧아서 크게 접점은 없었고 그저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다.
그리고 나중에 박시훈과 사귀게 됐고, 두 사람은 더더욱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설마, 고수혁이 자신에게 직접 약을 발라줄 날이 올 줄이야.
다행히 고수혁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약을 바르고 나서 면봉을 툭 던지고 자연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차가 서윤아 집 단지에 멈출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멈추자 서윤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고수혁은 시종일관 무뚝뚝한 낯이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그래.”
고수혁은 짧게 대꾸한 뒤 차를 몰고 자리를 떴다.
그에 서윤아는 내심 고수혁이 여전히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박시훈은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서윤아에게 사과했다.
“윤아야, 미안해. 오늘 일부러 널 두고 온 건 아니야. 그때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민지한테 일 생길까 걱정돼서 그랬어.”
그즈음 서윤아는 이미 감정을 많이 가라앉힌 상태였기에 그저 조용히 박시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 오빠 지금 너무 민지 씨를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
모르는 남자가 고민지에게 말 좀 걸었다고 그가 그렇게 화를 낼 건 없었다. 심지어 남의 파티를 망치면서까지 말이다.
“딴 남자가 민지 씨한테 다가가는 게 그렇게 싫었어?”
박시훈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난 그냥 부탁도 받았고, 민지는 아직 어리니까, 누구한테 속아 넘어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한 거야.”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박시훈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서윤아 눈에 아까 전 반응은 예전에 다른 남자가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고, 결국 더 따지기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 뿐이었다.
“이제 수혁 선배도 돌아왔으니까, 오빠 임시직도 끝날 때 된 건가?”
하지만 그 말에 박시훈의 낯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서윤아,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민지는 그냥 동생이야. 너 예전엔 이렇게 막무가내 아니었잖아.”
박시훈은 그렇게 일갈하고 차가운 낯을 한 채 서재로 들어갔다.
서윤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따끔거리는 가슴께를 꾹 눌렀다.
요 며칠 두 사람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크게 싸운 것도 아닌데 예전처럼 가깝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박시훈의 본가에서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식사 자리에서 박시훈의 부모님은 늘 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 둘은 언제 결혼할 거니? 언제 이 부모한테 손주 보여주려고.”
박시훈은 자신이 비혼주의라는 걸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이희숙은 서윤아가 부모를 일찍 여읜 고아라는 걸 항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박시훈이 죽어도 그녀와 사귀겠다고 한 게 아니면 절대 이희숙은 절대 서윤아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제 8년을 연애했는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하니 그녀의 인내심도 다 해갔다.
“윤아야, 너 혹시 그 무용 일 때문에 결혼 안 하려는 거니? 내가 말했지, 그냥 빨리 은퇴하고 아이 가질 준비 하라고.”
이희숙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서윤아를 쳐다봤다. 서윤아는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결국 박시훈이 입을 열었다.
“제가 결혼 미룬 거예요. 요즘 회사도 바쁘고, 결혼이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자 아버지인 박경식이 냉정하게 말했다.
“너도 이제 서른인데, 결혼이 어떻게 급한 일이 아니야?”
“그러게 일찍이 집안 격이 맞는 여자랑 결혼하라고 했잖니. 그러면 회사가 바빠도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예쁘기만 하면 뭐하니?”
이희숙이 비아냥대며 말을 덧붙였다.
“엄마,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박시훈이 눈을 찌푸리며 말하자 이희숙도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식사가 끝나고 박시훈과 박경식은 일 얘기를 하러 서재로 향했다.
이희숙은 서윤아와 한시도 같이 있기 싫어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고, 서윤아도 그 자리가 불편해 밖으로 나가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박시훈의 비서가 차를 몰고 왔다. 비서는 백미러에 비친 서윤아가 지친 낯을 한 걸 보고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입을 열었다.
“윤아 씨, 다음 주 회사 무도회에 오실 거죠?”
그에 서윤아가 눈을 슬쩍 뜨며 되물었다.
“무슨 무도회요?”
비서는 핸드폰으로 회사 파티 포스터를 찾아 보여주며 말했다.
“보세요. 다음 주에 회사 60주년 기념 파티가 있거든요. 대표님께서 저에게 드레스를 맞추라고 하셨어요. 아마 윤아 씨를 위한 깜짝선물이겠죠?”
아무렴 서윤아는 무용수였고, 박시훈의 여자 친구였다. 그러니 비서는 당연히 그녀가 박시훈의 파트너로서 파티에 올 것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