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오늘은 두 사람의 8주년 기념일이었다.
서윤아는 박시훈을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무용팀에 휴가를 내고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문 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논문 쓰는 거 너무 어려워, 시훈 오빠.”
부드러운 목소리엔 애교가 잔뜩 묻어 나왔다.
서윤아가 멈칫했다.
그런데 곧바로 박시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오빠가 도와줄게.”
그 달래는 듯한 말투는 서윤아가 예전에 익히 들었던 것이다.
서윤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이 아닌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는 박시훈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옆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고, 박시훈은 그녀의 옆에 붙어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다정하고 가까워 보였다.
그녀가 들어오는 걸 본 박시훈이 순간 멈칫하더니 곧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윤아야, 여긴 어떻게 왔어?”
그에 서윤아는 아무 대답 안 하고 그 옆에 앉은 여자를 쳐다봤다.
그 여자는 20대 초반으로 무척 어려 보였고, 보다 보니 8년 전 자신과 무척 닮은 것 같았다.
서윤아의 시선을 알아챈 박시훈인 입을 열었다.
“이쪽은 고민지라고, 수혁이 동생이야. 우리 회사에서 인턴 하는데, 수혁이가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해서.”
서윤아는 불편한 마음을 내리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밥 먹자고 하려고 왔어.”
그에 박시훈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고민지가 벌떡 일어났다.
“윤아 언니? 저 정말 언니 팬이에요!”
서윤아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박시훈은 그저 열성팬 같은 고민지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서윤아를 향해 말했다.
“민지도 한국 무용을 배웠거든.”
서윤아는 서울에서 가장 젊은 한국 무용단의 수석 무용수였기에 많은 무용 전공 학생들은 그녀를 우상으로 삼았다.
고민지는 두 사람이 밥 먹으러 간다는 걸 듣고 끼어들었다.
“저도 같이 가도 돼요?”
평상시였다면 서윤아도 흔쾌히 좋다고 했을 터였지만, 오늘은 그들의 8주년 기념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시훈이 고민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휴, 이 돼지. 가자,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
박시훈이 그렇게 먼저 말하자 서윤아도 더는 거절할 수 없어 그저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그래요, 같이 가요.”
결국 두 사람의 데이트는 세 사람이 함께 가는 식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박지훈은 시종일관 고민지를 챙겼다.
“아이스크림은 시키지 마.”
“디저트 많이 먹지 마, 왜 두 개나 시켜, 하나만 먹어.”
박시훈은 고민지가 시키는 메뉴를 하나하나 참견했다. 그 모습이 꼭 과보호하는 오빠 같았다.
서윤아는 속으로 그렇게 박시훈의 행동에 이유를 붙였다.
고민지는 먹고 싶은 메뉴가 절반 이상이 취소당하자 입술을 삐죽이며 삐진 얼굴을 했다.
박시훈은 고민지가 입을 꾹 다물자 결국 먼저 그녀를 달랬다.
“좀 있다가 회사 돌아가면 버블티 사줄게.”
그제야 고민지가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윤아는 자신들의 8주년 기념 자리에서 자신이 오히려 끼어든 제삼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박시훈이 고민지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무척 익숙했다.
그의 모든 행동이, 그녀에겐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행동이, 예전엔 자신에게 향했던 것들이니까.
8년 전, 서윤아가 20살이고 박시훈이 22살일 때.
박시훈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는 바람둥이었고, 서윤아는 연애는 물론 무용 말고 다른 것에는 관심 없던 학교 퀸카였다.
둘의 인연은 박시훈의 졸업식 날 서윤아가 축하 공연을 한 것으로 시작됐다.
그때 박시훈이 서윤아에게 반해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
서윤아의 부모님은 불행한 결혼 생활에 일찍이 이혼했고, 그녀도 원래 냉소적인 성격에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연애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박시훈의 사랑 공세는 만만치 않았다. 여자에게 인내심을 가지 적 없던 박시훈이 서윤아에게만은 유독 집착하며 무려 반년을 쫓아다녔다.
두 사람이 밥 먹으러 가면 그녀의 입맛을 기억하고, 그녀의 생리 주기가 다가오면 꿀물을 챙겨주었다.
그녀의 모든 대회에 나타났고, 언제나 가장 먼저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또 그는 그녀를 위해 불꽃놀이를 준비하고, 다른 모든 여자들을 거절하며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서윤아의 마음이 아무리 철옹성이라도,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바람둥이였던 박시훈이 주위 여자를 다 정리하고 8년 동안 서윤아와 함께했다.
8년 전, 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 박시훈은 언제나 서윤아를 챙겼다.
그리고 8년 뒤, 두 사람의 데이트에 박시훈은 다른 여자를 챙기고 있다.
서윤아가 문득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때, 웨이터가 음식을 나르다가 실수로 뜨거운 국을 고민지의 손등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아!”
고민지가 비명을 질렀고, 박시훈의 얼굴이 곧장 차갑게 굳으며 화를 냈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지?”
그리고 고민지가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아 들고 급히 식당을 나갔다.
꼭 여자 친구인 서윤아는 완전히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멀어지는 박시훈의 뒷모습 멍하니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가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서윤아가 직접 만든 8주년 기념 케이크였다.
박시훈에게 서프라이즈 해줄 생각으로 서윤아가 미리 매니저에게 식사 중에 가져오라고 부탁했던 거였다.
하지만 지금, 텅 빈 맞은편 자리를 보고 매니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의 손에 든 커다란 케이크에는 ‘8주년 축하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비아냥밖에 되지 않는 축하였다.
“서윤아 님, 이건…”
매니저의 목소리에 서윤아가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내며 체면치레했다.
“케이크는 직원들끼리 나눠 먹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가방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서윤아는 차가 오가는 길을 보며 순간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첫 기념일이 생각났다. 그때 박시훈은 그녀를 위해 레스토랑 전체를 대관하고 장미꽃 천 송이를 선물했었다.
서윤아는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너무 크게 일을 벌이지 말라고 타박했었다.
그리고 그때 박시훈은 그녀를 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윤아야, 내가 널 사랑하는 거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는걸.”
그동안 그녀의 생일이든, 발렌타인데이든 아니면 다른 기념일이든, 박시훈은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서윤아는 박시훈이 예전만큼 기념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거의 둘이서 밥 한끼 먹는 걸로 끝내곤 했다.
불타는 사랑이 식고 점점 평온한 사랑으로 변하는 거라고, 모두가 그렇다고 서윤아는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설마, 자신을 사랑한다고 온 세상에 외치던 남자가, 자신들의 기념일을 잊어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서윤아는 혼자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김이 서린 욕실 안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바로 나가지 않고 멍하니 안에 있는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있는 자신은 여전히 길고 날씬하고 수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 머릿속에 어떤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똑같이 예쁘지만, 맑은 눈 안에 생기가 가득 찬 그 표정.
더는 자신에게 없는 표정 말이다.
누구든 영원히 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젊은 사람들은 넘쳤다.
지금 20살인 고민지처럼.
박시훈이 집에 돌아왔을 땐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계속 고민지와 병원에 있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고민지를 걱정하느라 병원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돼, 알았지?”
“무슨 일 있으면 간병인 불러, 혼자 하지 말고.”
서윤아는 그 소리를 조용히 들으면서 그가 벗어 둔 겉옷을 정리해 걸어 두었다.
그런데 그의 겉옷 주머니에서 사탕이 몇 개가 있는 걸 발견했다.
리치 맛이었다.
그때 박시훈이 전화를 끝내고 다가왔다.
“오빠 사탕 안 좋아하잖아.”
서윤아가 그를 향해 손에 든 사탕을 내보이며 물었다.
그를 박시훈이 흘깃 보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사탕을 가져가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민지가 좋아해서. 회의할 때 심심해하면 주려고 준비해 둔 거야.”
그에 서윤아가 살짝 놀랐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좀 더 어릴 때, 매번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하는 자신에게 박시훈은 항상 주머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박하 맛 사탕을 꺼내 주던 게 기억났다.
“자기야, 사탕 먹으면 긴장 좀 풀릴 거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박하 맛 사탕이 리치 맛으로 변해 있었다…
서윤아는 아무 말없이 멍해졌다.
박시훈이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는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왼쪽 손목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자 그제야 서윤아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이자 박지훈이 제 손목에 걸어준 얇은 팔찌가 보였다.
섬세한 세공이 딱 봐도 값비싸 보였다.
박시훈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나직하게 말했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윤아야, 미안해. 오늘 우리 8주년 기념일인데, 같이 못 있어 줘서.”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뒤늦게 생각난 듯했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민지는 너무 신경 쓰지 마. 애가 아직 어리고, 또 수혁이가 출국하기 전에 직접 나한테 부탁하지 않았으면 나도 그렇게 챙기지 않았을 거야.”
서윤아가 축 늘어트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알아.”
일이 그렇게 일단락됐다고 생각한 박시훈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서윤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요동치는 마음을 삼켰다.
예전에 그녀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박시훈은 어떻게든 그녀를 기분 좋게 해주려 노력했다.
심지어 언젠가 한 번은 두 사람이 싸우고 서윤아가 혼자 냉정해지고 싶어서 전화를 안 받았더니 박시훈은 열 몇 시간을 비행기 타고 미국에서 돌아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과 한마디조차 대충하고 넘어갔다.
결국 서윤아는 인정했다.
박시훈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