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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나도 이런 오해가 생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화가 잔뜩 나 있는 임지아를 발견하고, 나는 곧바로 해명했다. “정 비서님, 이 분이 임지아씨 입니다.” 정지훈도 약삭빠른 편이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곧바로 몸을 돌려 임지아에게 커피를 전해주었다. 임지아는 힐끗 쳐다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전 블랙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블랙커피는 주한준 취향이었다. 예전에 주한준에게 맞추느라 블랙커피를 하도 많이 마셨더니 이젠 습관적으로 블랙커피를 시키게 되었다. 그녀의 말에 정지훈은 머리를 콩콩 때렸다. “제 정신 좀 보세요. 형수님,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임지아는 그의 잘못을 따질 생각이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후, 임지아는 오후 내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퇴근 시간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직원들은 속속히 퇴근하기 시작했다. 결국 텅 빈 작업실에는 나와 임지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일에만 몰두했다. 그때,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한준이 서 있었다. 먼지가 가득한 것이 마치 금방 일을 끝낸 것 같았다. 주한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단번에 그의 얇은 입술에 생긴 피딱지를 발견했다.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아는?” 그는 마치 어젯밤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필름이 제대로 끊긴 것 같았다. “아직 퇴근 안 했습니다.” 주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곧바로 기술팀 사무실로 갔다. 잠시 후, 임지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오빠, 여긴 갑자기 왜 왔어?" “지훈이가 네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해서 한번 와봤어. 괜찮아?” “응. 괜찮아. 정말 내가 걱정돼서 달려온 거야?” 임지아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주한준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한편, 임지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은 꽤 화기애애해보였다. “오빠, 입술은 왜 그래?” 그때, 임지아가 주한준 입술의 상처를 발견하고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어디에 부딪혔어.” 곧이어 주한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의 말에 임지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임지아는 잠시 화장실에 갔다. 주한준은 그런 그녀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코딩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진전은 어떻게 돼?” “괜찮습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사람이 기계도 아니니까.” 말을 마치고, 그는 사무실 책상에 놓여있는 달력을 확인했다. 달력에는 나의 사업 계획이 정연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다시 코딩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주한준은 다른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일은 지아에게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주한준이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주한준이 여기에 온 목적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어젯밤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나에게 실수였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주한준에게서 직접 들으니 가슴이 왠지 아려왔다. “대표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나는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리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주한준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마 내가 이렇게 말할 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때마침 멀리에서 임지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나와 주한준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축 처진 눈꺼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예정된 업무 완성 시간을 지연시키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임지아의 안색이 밝아졌다. 두 사람이 떠난 후, 나는 오늘도 야근을 했다. 아파트 문앞에 도착했을 때, 오영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 조민혁 쓰레기 같은 자식. 내가 그렇게 많은 연봉을 주겠다는데도 여전히 같잖은 허세를 부리고 있어.” 오영은이 말하는 조민혁은 그녀가 예전부터 발굴하고 싶었던 홍보팀 매니저였다. 그는 조민혁에게 우리가 만든 게임의 홍보 업무를 맡기려고 했었다. 나는 농담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정 안 되면 미인계로 유혹해봐.” “미워, 정말.“ 오영은이 화를 냈다. “언니가 좋아하는 스타일 아니야?” 일하러 가는 건지 아니면 연애하러 가는 건지 헷갈렸다. 잠시 후, 휴대폰 너머에서 오영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좀 어때? 내가 없어서 며칠 좀 고생했지?” “괜찮아. 만약 주한준이 10억만 더 투자를 해주면 난 주한준한테 간이고 쓸개고 전부 다 줄 수 있어.”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겠는가?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고 하던 참에, 공교롭게도 고개를 들어보니 멀지 않은 곳에 나란히 서 있는 주한준과 임지아의 모습이 보였다. 임지아는 예쁜 두 눈을 반짝이며 깜짝 놀란 듯한 말투로 말했다. “선배님도 여기에 사세요?” 주한준은 임지아와 꽤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순간, 나는 두 사람이 나랑 오영은의 대화를 엿들었을까 봐 두려웠다. 그도 그럴것이 그 어떤 투자자도 매일 누군가가 자신의 호주머니를 탐내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사 온지 몇 개월 됐어.”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저도요.” 임지아가 말했다. “그런데 전 평소에 선배님을 거의 만나지 못한거 같아요.” “내 생활 리듬이 불규칙적이어서 그래.” 프로그래머는 다른 직종보다 야근도 많이 하고 가끔 밤낮이 바뀔 때도 많아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오늘처럼 말이다. 잠시 후, 우리 세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랑 임지아는 각각 9층과 10층에 산다. 임지아는 내가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했다. 만약 내가 임지아보다 먼저 이 아파트에 이사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쁜 마음을 품고 일부러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의심하기 충분했다. 이건 다 주한준이 깊이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나는 전에 분명히 그에게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임지아는 나를 힐끔거렸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은 내 손에 떨어졌다. “DavidLiu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새로운 모델이네요?” 임지아는 부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국내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매하신 거예요?” 임지아가 물어본 것은 엄겨울이 선물한 핸드백이었다. 전에 선물 받을때엔 그저 질감이 좋다고만 생각했지 DavidLiu가 디자인 한 것인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임지아의 반응을 봐서는 꽤 인기가 많은것 같았다. “친구가 선물해 준거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임지아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친구분이 신경을 많이 쓰셨네요. 이 핸드백은 전 세계에 딱 100개밖에 없어서 소장가치가 뛰어난 제품이에요.” 나는 전에 이 핸드백이 한정판인 줄도 몰랐었다. “그저 가방일 뿐이야. 마음에 들어?” 그때, 주한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요.” 임지아는 부러운 기색을 감추며 해명했다. “전 그저 언니가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는 살짝 인사를 건넨 후 밖으로 묵묵히 걸어나갔다. 그때, 뒤에서 주한준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보아하니 우리 지아는 보는 눈이 있다는 뜻을 잘 모르는 거 같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가방을 보는 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남자를 보는 눈도 없었다. 가방 얘기가 나온 김에, 나는 가방 안에 있는 로고를 뒤적거렸다. 인터넷으로 가격을 찾아보니 어마어마한 가격에 깜짝 놀랐다. 이건 알 사람만 안다는 브랜드였는데 그 가격이 무려 다섯 자릿수에 달했다. 나는 갑자기 이 가방을 들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는 것이 가방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엄겨울을 위해 만들어준 사이트에 값을 매겨도 이 가방 가격에는 미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갑자기 엄겨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엄겨울의 연락처를 찾으려고 휴대폰을 뒤적거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뭐라고 해야 할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누군가 그녀에게 친구 신청을 보냈다. 프로필 사진을 클릭하자 나는 마치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은 것 같았다. 일몰 사진이었다. 그건 아주 오래 전 주한준이 대학교에 다닐 때 인공 호수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날은 내가 주한준을 쫓아다닌 지 제1460일 째 되는 날이었다. 나와 주한준은 함께 사람을 피해 푸른 잔디밭에 앉아 햇빛도 쬐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도 만끽했었다. 그는 책을 읽고, 나는 그런 주한준을 바라보았었다. 석양이 질 때까지 우리 두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었다. 당시 약간 기가 죽어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찮게 실수로 내 손과 주한준의 손이 맞닿았었다. 내가 손을 막 거두려고 할 때, 주한준이 내 손을 덥석 잡았었다. 그건 주한준이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내 손을 잡은 순간이었다. 석양이 지기 전, 그는 그것을 사진으로 남겼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삭제되었던 프로필이 다시 친구 신청 목록에 나타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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