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다급히 카메라를 돌렸다.
곧이어 휴대폰 너머에서 심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꽤 의아해했다.
“미안해, 진아야. 이것 좀 봐, 너를 너무 오래 붙잡아두고 수다를 떤 것 같아. 우리 나중에 따로 시간을 잡아서 만나자.”
그녀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난처한 눈빛으로 엄겨울을 바라보았다.
“미안, 한준 씨 어머니가 뭔가 오해를……”
“힘들지?”
엄겨울은 걱정이 가득 섞인 말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엄겨울을 쳐다봤다.
엄겨울은 일이 힘든지를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전남친의 어머니를 상대하는 게 힘든지를 물어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나에게 블루베리 한 알을 건네주었다.
“피로 회복에 좋대. 많이 먹어.”
그의 호의에도 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다급히 대화 주제를 돌렸다.
“시간도 거의 됐으니 어서 밥 먹으러 가자.”
엄겨울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심화연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일식집.
나는 눈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접시를 보고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내가 모처럼 식사를 대접하는 거니까 꼭 많이 먹어야 해.”
말을 마치고, 나는 연어 한 접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넣었다.
그러자 엄겨울은 나를 힐끗 쳐다봤다.
“진아야, 넌 너무 말랐어. 건강이 최우선이야. 사업에 뛰어들고 싶다며? 그러면 건강부터 잘 챙겨야 해."
그는 연아를 다시 내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럼 같이 먹자.”
나는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번 식사 분위기는 아주 유쾌했다. 하지만 내가 계산하려고 할 때, 종업원은 예의 바르게 엄겨울이 이미 계산을 마쳤다고 알려주었다.
“다음 번에 네가 계산해.”
엄겨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밥값을 보냈지만, 그는 내 계좌이체를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꼭 더치페이를 하고 싶었다.
그러자 엄겨울은 마치 내 약점이라도 잡은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턱 쏘고, 내가 한턱 쏘면 그것도 더치페이야.”
“……”
나는 잠시 뭐하고 말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모든 일정이 끝났을 때, 시간은 이미 저녁 9시가 되었다. 엄겨울은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가로등 아래에 엄겨울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그는 좀처럼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안경을 밀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거봐요, 코딩 말고도 다른 재밌는 일이 아주 많죠?”
식사를 마친 후 근처에서 산책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저 따라간 것 뿐인데 엄겨울은 아주 재밌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런 호의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늘 고마웠어. 조심히 가.”
엄겨울은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한 후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 눈을 감고 있어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심화연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오늘 밤 주한준은 임지아를 주씨 가문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할 것이다.
나는 6년 동안 사귀면서도 주씨 가문의 대문에 발 한 번 들여놓지 못했는데……
확연히 대비가 되었다.
하긴, 2년 전쯤부터 나와 주한준의 운명은 많이 달랐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내 사색을 방해했다.
“누구세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문 틈 사이로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맞다, 주한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늘 밤, 그는 임지아를 데리고 가족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왜 지금 내 방으로 찾아 온 거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밖에서 주한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문 열어.”
말투는 굉장히 강압적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리 투자자라 해도 한밤중에 집으로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주한준은 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의 행동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격렬해졌다.
나는 이웃의 쉬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문을 살짝 열었다.
“무슨 일이야?”
고개를 들자, 주한준의 흐트러진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강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을 닫기도 전에 주한준은 문을 세게 밀더니 집 안으로 들어와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여보, 여보는 정말 독한 사람이야. 왜 남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야?”
주한준은 얼굴 전체를 내 어깨에 파묻었다. 그는 어눌한 말투로 물었다.
과음한 게 분명했다.
‘설마 아직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이 모든 게 오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쩌면 진짜 와이프를 찾아갔을 수도 있었다. 주한준이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주한준이 오늘 심화연의 가족 모임에서 임지아와 다퉜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긴, 그렇게 오만한 주한준을 한밤중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임지아 말고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생각에 나는 마음을 다잡고 주한준에게 알려주었다.
“네 와이프는 위층에 있어.”
말을 마치고, 나는 주한준을 밀어냈다.
하지만 주한준은 나를 놀아주기는 커녕 오히려 더 세게 품에 꽉 끌어안았다.
“여보,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난거야?”
비위를 맞추려는 말투에 탐욕스러운 포옹까지, 순간 나는 마음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한준, 사람 잘못 봤어.”
나는 이를 꽉 악물고 소리쳤다.
“너무해. 어젯밤에는 남편이라고 부르더니, 오늘 밤엔 그냥 이름을 부르는 거야?”
주한준은 생각보다 더 많이 취한 것 같았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주한준, 고개를 들고 봐봐. 내가 누구야?”
주한준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랐다. 순간 가슴이 아파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나는 주한준이 이렇게 추태를 부리는 모습을 오늘 처음 봤다.
잠시 후, 주한준은 나를 현관으로 잡아 당기더니 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는 주한준의 눈에서 솟구치는 욕망을 보았다.
나의 호흡 또한 흐트러졌다. 아니, 모든 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주한준이 키스를 퍼부을수록 내 가슴은 더욱더 차가워졌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주한준은 고통에 숨을 들이마시며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묵묵히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호흡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주한준은 마치 조금 전의 줄거리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듯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고,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바람 빠진 공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월요일 아침, 나는 어느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러 갔다. 우연히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임지아와 마주쳤다.
임지아는 귀엽게 똥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임지아는 나를 발견하고 기분 좋게 인사를 했다.
“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
딱봐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젯밤 식사 자리에서 싸운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에 어젯밤 넋이 반쯤 나가 있었던 주한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조금 의아했다.
그때, 임지아의 휴대폰에서 갑자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고생 많았어. 아무 걱정하지 마. 우리 집은 내가 잘 처리할게.”
나지막하고 허스키한 것이 금방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주한준의 목소리였다.
임지아는 실수로 스피커 폰을 킨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잠근 후, 나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더니 한쪽으로 가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나는 어렴풋이 임지아가 음성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들었다.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너무 기뻐.”
이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주한준은 묵묵히 임지아를 지켜주었다.
소녀가 나처럼 슬퍼하면 안 되니까.
오전내내 나는 열심히 코드만 두드렸다.
점심 휴식시간이 끝나자 작업실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그러더니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주 대표님의 비서인 정지훈 이라고 합니다. 형수님께 커피 배달을 하러 왔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역시 정지훈이었다.
정지훈은 주한준의 과후배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주한준을 존경하더니, 졸업하고 나서는 주한준의 심부름을 담당하고 있다.
커피 심부름까지 하다니, 보아하니 주한준의 낭만 세포는 임지아에 의해 활성화 된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한테 성큼성큼 걸어오는 정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형수님, 여기 커피요.”
정지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나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막 이 말을 내뱉었던 순간, 막 사무실에서 나온 임지아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