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주한준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원래 이 친구 신청을 무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하필 주한준은 대표이자 투자자였다.
만약 주한준이 공적인 이야기를 나눌 목적으로 친구 신청을 한 거라면? 이런저런 생각에 나는 할 수 없이 친구 신청을 받아주었다.
잠시 후, 주한준은 갑자기 10억을 입금해주었다.
한밤 중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나는 깜짝 놀라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
그러자 주한준은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다.
“보상이야.”
그때, 어젯밤 주한준의 뜨거운 입맞춤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역시 투자자답게 손이 정말 크군.’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바로 수금 확인을 눌렀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걸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만약 이 돈을 받지 않으면 주한준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돈을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렇게 대화창에 글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금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말 한 마디를 나누는 것도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시간에 맞춰 회사에 출근했다. 하지만 내 착각인건지 임지아가 자꾸만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떠보는 것 같았다.
그런 시선에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점심 시간이 끝난 후, 임지아는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선배님, 혹시 반나절만 쉬어도 될까요?”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를 내려고 하는 거였구나.’
내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임지아가 계속 말을 했다.
“오빠 어머니께서 저랑 디저트를 같이 즐기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쩔쩔매고 있었다.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 나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괜찮아. 마음 편히 가. 시간이 너무 늦으면 바로 퇴근해도 돼.”
그러자 임지아는 긴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말을 이어갔다.
“선배님, 역시 선배님은 이해심이 깊다니까요?”
임지아는 이미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다 끝냈으니 그녀의 휴가가 임무 진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화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남진아. 내가 그렇게 널 믿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심화연은 어찌나 화가 많이 났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자칫하면 휴대폰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임지아가 너희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심화연은 화가 나 씩씩거렸다.
“너 지금 준한이랑 짜고 나를 속이고 있는 거야?”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심화연의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혼란 속에서 임지아가 연신 사과하는 목소리도 얼핏 들려왔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거기로 가겠습니다.”
이런 일은 전화로 한 두 마디 설명하는 것만으로 오해를 충분하게 풀 수 없었다.
15분 뒤, 나는 심화연과 임지아가 있는 고급 커피숍에 도착했다.
멀리에서 보니, 임지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심화연맞은켠에 앉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심화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는데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니.”
나는 심화연 맞은켠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러면서 심화연 앞에 놓인 커피를 옆으로 밀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이 여사님한테 저당 과일 주스 한 잔 주세요.”
심화연은 심장이 좋지 않아 의사가 그녀한테 커피를 적게 마시라고 당부했었다.
나의 이런 행동에 심화연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준이도 어리바리한데 너까지 한준이를 따라서 소란을 피우다니…… 어떻게 이런 일에 동의할 수 있어?”
말을 마치고, 심화연은 임지아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이 말을 들은 임지아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아랫입술만 꼭 깨물고 있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를 속인 건 저희 잘못이 맞아요. 하지만 지아도 대표님 결정에 따랐을 뿐,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심화연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눈에 거슬리지 않아?”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엄청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제가 많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지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등 뒤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빠……”
왠지 조금 전보다 눈시울이 더 빨개진 것 같았다.
“도대체 당신들은 우리 지아한테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때, 주한준이 임지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감싸주며 말했다.
‘당신들?’
그 ‘당신들’에 물론 나도 포함이었다.
주한준은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주한준은 평소 감정기복이 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기 드물게 통제력을 잃은 것 같았다. 심화연 앞에서 이렇게 화를 내다니……
내 기억 속에서, 두 모자는 한번도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주한준은 임지아를 위해 자기 어머니에게도 날카로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화연은 일이 이 정도로 크게 번질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주한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말을 마치고, 심화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내가 막 심화연을 따라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주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아부를 떨려고?”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빠, 오해야. 이건 선배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말실수를 해서……”
옆에 있던 임지아가 서둘러 해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주한준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만약 나한테 잘못이 있다면, 그건 이 진흙탕 싸움에 선뜻 개입한 것이겠지.
“난 이만 회사로 들어가 볼게.”
“선배님, 오빠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세요.”
임지아가 말했다.
“아니, 됐어. 같은 길도 아닌데 뭐.”
회사로 돌아온 후에도 생각하면 할 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후의 그런 소란 때문에 왠지 내가 주한준의 옛 애인이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주한준은 과할 정도로 임지아를 총애하고 있다. 순간,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했다.
오영은 말이 맞았다.
그때, 카카오톡 알림음이 내 생각을 방해했다.
주한준이 또 200만원을 계좌이체했다.
매혹적인 숫자였다. 나도 모르게 경직 되었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걸 미쳤다고 욕해야 하나, 아니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야 할까?‘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주한준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생했어. 보상이야.]
간단한 몇 마디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순간,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내 머릿 속에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주한준이 어떤 사람인가? 금융학과에서 신으로 불리우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돈 관리자인데 어떻게 나한테 돈을 공짜로 줄 수 있겠는가?
잠시 고민 끝에 나는 친구 삭제 버튼을 눌렀다.
“모레 몇 시에 출발하세요?”
퇴근하기 전, 김가온이 나한테 다가와서 물었다.
“어딜?”
나는 살짝 어리둥절했다.
“겨울이 오빠 생일 파티요.”
말을 마치고, 김가온은 이상함을 깨달았는지 다시 되물었다.
“설마 선배님한테 아직 말하지 않은 거예요?”
엄겨울은 확실히 나한테 얘기를 꺼낸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어쨌든 친분도 그렇게 깊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김가온 덕분에 엄겨울에게 어떻게 답례를 하면 좋을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쇼핑앱에도 마땅히 선물할 만한게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엄겨울이 대학생 시절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내일 점심 시간에 쇼핑몰을 둘러보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다음날로 넘어갔다.
나는 계획대로 쇼핑몰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친구한테 선물하려고요. 참고로 성별은 남자에요.”
종업원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빈티지 스타일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빈티지 브라운은 가성비가 아주 좋습니다. 한 번 확인해보세요.”
가격도 꽤 합리적이었다.
“그걸로 주세요.”
“남자친구 분께서 복을 받았나봐요.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행복해할 거예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선물을 받을땐 가격도 잘 알아봐야겠어.’
다행히 주한준이 계좌이체를 해준 덕분에 선물을 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선배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나는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확인했다.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주한준과 임지아가 나란히 앞에 서 있었다.
정말 공교롭기 그지 없었다.